1 / 1
" 현대해상"으로 검색하여,
2 건의 기사가 검색 되었습니다.
-
2024-09-10▲ 사회적가치연구원 세션 초청장[출처=SK]SK그룹이 설립한 비영리연구재단 사회적가치연구원(이사장 최태원)에 따르면 2024년 9월12일 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 사무국 주관으로 코엑스에서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가 개최된다.‘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에서는 사회적 가치의 측정과 보상을 제도화할 수 있을지 논의의 장이 마련된다. ◇ 전체 행사 정보· 행사명 : 제1회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 일시/장소 : 9월12일(목) 10:00~18:00, 코엑스· 주최 : 대한상공회의소· 공동주관 : 대통령직속 국민통합위원회, SOVAC, 현대해상,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코엑스, 한국경영학회· 후원 : 행정안전부◇ 세션 정보· 세션명 :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 - 사회적 가치 측정과 보상· 주관 : 사회적가치연구원(SK 설립 비영리재단)· 일시/장소 : 9월 12일(목) 17:00~17:50, 코엑스 B홀 아셈볼룸 209호· 주요 내용 : 사회적 가치 측정-보상 조례 제정 의의 및 향후 법제도적, 행정적 이슈 논의· 연사 : 김효선 변호사(법무법인 더함), 문재원 과장(제주도청), 최영준 교수(연세대학교 행정학과)본 행사에는 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에 참여해 사회문제 해결 성과와 기업의 가치가 입증된 우수 사회적 기업들이 전시, 마켓, 부스 등으로 참여한다. 우수 사회적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동천, 브라더스키퍼, 상상우리, 소소한 소통, 쉐코, 스탬피플 사회적협동조합, 스프링샤인, 씨튼장애인직업재활센터, 아립앤위립, 양양청년협동조합, 에코맘의 산골이유식, 이퀄테이블, 점프, 제리백, 테스트웍스, 플라워럼프, 화이통협동조합, 히즈빈스 (가나다순, 우수 기업 인터뷰 문의: 사회적가치연구원)사회적가치연구원 나석권 대표이사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업이 얼마를 썼는지에 관심 갖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대중들의 칭찬은 효과적으로 사회문제 해결 성과를 달성하고 입증하는 기업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또한 “전 세계 유명 기업들도 사회문제 해결 성과에 기반해서 추가 펀드를 지원하는 추세다. 국내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지역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회적 기업을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이들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SK의 사회성과인센티브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아울러 “오는 12일 개최되는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는 국내 사회적 가치 트렌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사회적 가치의 측정과 인센티브가 기업의 사회문제 해결의 트렌드가 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SK사회성과인센티브 규모[출처=SK]SK는 지난 10년 간 ‘사회성과인센티브(SPC, Social Progress Credits)’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 기업에 711억 원의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했다.지난 10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통해 혜택을 입은 사회적 기업은 448개로 이들 기업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는 누적 약 5000억 원에 달한다. 2024년 9월 약 90억 원 지급 예정을 포함해 SK가 사회적 기업에 지급한 현금 인센티브는 711억 원이다.SK는 2015년부터 우리나라 448개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다. ‘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는 SK가 '기업이 경영성과를 높이면서도 사회문제를 더 많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SK는 해결 방법으로 '기업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면 그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고 화폐적으로 환산하고 이에 비례해 시장에서 보상을 주는 방식'을 제시했다. 따라서 기업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높이기 위해 비즈니스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는 것이다.SK는 이러한 가설에 따라 각 사회적 기업이 해결한 사회문제의 양(사회성과)에 비례해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를 실천해 왔다. 사회적 기업은 그 인센티브를 활용해 더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했다.이러한 ‘사회성과인센티브’의 효과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 하버드대학 MBA에 소개되고 그 효과는 세계 유명 학술지에서 검증됐으며 최근에는 WEF 슈왑재단과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2020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기업 사례 연구 교재(세라핌(George Serafeim) 교수)· 2022년 세계 유명 학술지 Management Science 논문 게재(서울대학교 신재용 교수, 동국대학교 정선문 교수)· 2024년 WEF 슈왑재단(Schwab Foundation)과 SK 사회적가치연구원 공동연구· 2024년 1월 WEF와 딜로이트가 공동으로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기업과 사회혁신 간 파트너십 우수사례, 2024년 8월 스탠퍼드 소셜 이노베이션 리뷰에서는 글로벌 최초의 민간 기업 주도 성과기반 보상 사례로 평가받았다.국내에서는 제도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6개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측정과 인센티브를 도입하고 있다.· 2024년 6월 제주특별자치도 조례 제정(‘제주특별자치도 사회적경제기업 사회성과 측정 및 보상사업에 관한 조례’)· 서울시, 경상남도, 전라남도, 화성시, 춘천시
-
현대그룹(이하 현대) 사옥에서 전 회장인 정몽헌의 사망 10주기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정몽헌 회장은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던 대북사업을 이어 받았지만, 2003년 대북송금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공동으로 현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2001년 형제의 난으로 그룹을 장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어난 사건이었다.현대는 2000년 왕자의 난, 2003년 숙부의 난, 2006년 시동생의 난 등 다양한 분쟁을 겪었고 현재도 이 갈등은 지속 중으로 언제 중단될지 미지수다. ◇ 왕자의 난과 그룹의 분할정주영 회장은 다른 재벌그룹과 달리 학력이나 집안의 배경도 없이 맨 몸으로 그룹을 일구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라이벌 그룹인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관리자형 리더십을 발휘한 것과 달리 정주영 회장은 현장형 리더십을 바탕으로 조직을 장악했다.정주영 회장은 자식을 많이 두면서 그룹의 승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장남의 사망 이후 특별히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자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사망하면 자식들이 재산싸움을 할 것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의 분할이었다. 각종 자료를 보면 정주영 회장은 자식들에게 계열사를 골고루 나눠 줄 생각을 가졌었다. 차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자동차관련 기업, 3남 정몽근은 금강개발, 5남 정몽헌은 현대상선와 현대전자 등,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7남 정몽윤은 현대해상, 8남 정몽일은 현대종합개발금융 등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장남과 4남은 사망해 개별 계열사를 물려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룹을 분할해 상속하겠다는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오히려 형제간의 분란만 키웠다.정주영 회장은 1998년 그룹 회장으로 정몽구와 정몽헌을 지명하며 공동회장 체제를 구축했다. 가장 경영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두 아들에게 그룹경영에 대한 경험을 체득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인다.2000년 불안정한 동거를 유지하던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은 그룹의 인사권을 두고 대립을 한다. 정몽구 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계열로 보이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인사조치하자, 정몽헌 회장이 반발을 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던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살아있던 정주영 회장이 차남인 정몽구가 아니라 5남인 정몽헌의 편을 든 것이다. 정몽헌 회장이 아버지의 뜻이라며 공동 회장인 정몽구 회장을 면직시켰다.정몽구 회장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자신과 정몽구, 정몽헌 3부자 동반퇴진이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현대자동차 관련 기업들을 이끌고 그룹을 떠났다. 2001년 정주영 회장이 사망한 후 정몽준의 현대중공업도 현대에서 분리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평생을 일군 현대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었다. 현대는 현정은 회장이 이끌고 있는 현대, 정몽구 회장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정몽근 회장의 현대백화점그룹,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 정몽윤 회장의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개별 그룹들이 분리된 이후 각개약진으로 성장을 했지만 현대기아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을 제외하면 존재감이 미약해 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왜 정몽헌 회장에게 그룹을 넘겼을까정주영 회장은 왜 차남이지만 실질적인 장남역할을 하고 있던 정몽구 대신에 5남인 정몽헌에게 그룹을 넘길 결심을 했을까?정몽헌 회장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가 머리회전도 빨랐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 정주영 회장이 총애했다고 말한다. 낮은 학력의 막 노동자로 그룹을 일군 정주영 회장의 입장에서는 학벌과 머리가 좋은 자식이 그룹을 잘 관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게 마련이다. 삼성그룹이나 대우그룹 등의 창업자나 후계자들이 화려한 학력을 가진 것을 부러워했을 수도 있다. 정주영 회장이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많이 한 참모들과 토론을 하면서 학벌과 지식의 중요성도 느꼈다고 볼 수 있다.자신은 무작정 부딪히고 난관을 돌파하면서 현대를 키웠지만, 기업환경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능력과 이미 성장해 대규모 기업집단이 된 기업을 관리하는 능력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몽헌 회장이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면 외관상 지적으로 보이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지적이다는 평가와 우유부단했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정주영 회장의 입장에서 자신과 상반된 캐릭터를 가진 정몽헌 회장이 현대를 잘 관리하고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겠지만 현대는 이미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는 정주영 회장의 현장형 리더십에 익숙한 상황이었다. 정몽헌 회장이 야생마처럼 길들여진 현대를 이끌어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인이 회장이 된 이후 현대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주영 회장과 함께 현대를 일군 가신과 참모들도 하나 둘씩 현대를 떠났고, 자신이 목숨처럼 여겼다고 하던 계열사들도 부실화되면서 채권단에 넘어갔다.2000년 5월 현대건설이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1년 현대전자도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안은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채권단의 손으로 넘어갔다.현대종합상사, 현대투자신탁, 현대정유 등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현대의 품을 떠났다. 현대건설은 현대의 핵심계열사로 자존심이었고, 현대전자는 정몽헌 회장 본인이 1992년 주도적으로 설립한 회사로 단기간에 반도체 강자로 등극시켰던 기업이다.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 것은 현대를 압박하기 위한 정권차원의 압력이었다는 의혹이 일었지만 부채관리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무모한 차입경영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형인 정몽구 회장을 제치고 그룹의 승계자가 되었지만 정작 정몽헌 회장 본인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다. 본인의 피와 땀이 배인 핵심 계열사가 줄줄이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추진하던 대북사업은 현대의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었다.역사서 만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만약 정몽구 회장이 현대를 물려 받고, 정몽헌 회장은 일부 계열사를 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현대가 분할되지 않고, 형제들도 재산싸움을 하지 않고 사이 좋게 잘 지내고 있을까? 정주영 회장은 2남인 정몽구 회장보다는 5남인 정몽헌 회장이 공룡화된 현대를 이끌 적임자로 본 것은 리더십의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현장형 리더십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산업화 시대가 끝났고, 21세기 정보화시대에는 세심한 관리와 직관이 중요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거침없이 성장하면서 한국경제를 지배하던 현대의 신화가 정보화시대가 도래하면서 퇴색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대가 새롭게 변신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정몽헌 회장의 사망으로 사라졌다. ◇ 현정은 회장 체제는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현대는 정몽헌 회장의 사후 그의 아내인 현정은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정몽헌 회장이 형제들과 승계분쟁을 거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에 형제들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하지만 가정주부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대기업의 회장으로 경영에 참여한다는 결정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현대의 주력사업인 대북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서 과연 현정은 회장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남편의 뒤를 이어 현대를 이끌게 된 현정은 회장에게 도전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범 현대가 그룹의 적통을 이어받은 현대를 현씨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절박감이 투영된 것이다.첫 번째 도전은 2003년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회장이 이끄는 KCC그룹이 현대의 지주회사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에 도전한 것이다.2006년에는 정몽준 의원이 이끌고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의 핵심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가져가기 위해 돌진했다. 이어 2008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과 2010년에는 현대차그룹과 법정관리 중이던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현대가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은 어렵게 지켰지만, 현대건설은 현대차그룹에게 인수됐다. 현대엘리베이터는 부실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한 잘못된 의사결정 때문에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고 아직도 분쟁은 진행 중이다.현대상선은 실적이 개선되지 않아 현대가 경영권을 유지할 지 의문이다. 핵심계열사인 현대아산은 대북사업이 좌초되면서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정은 회장체제 10년을 평가한다면 부정적이다. 가정주부가 하루아침에 대기업의 회장이 되면서 나름 선방했다고 볼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경영은 정상화시키지 못했다.현정은 회장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결과를 좋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현정은 회장이 현대의 화려한 과거를 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계속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