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0.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한계와 극복 노력... 2000년 동안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 정서 해결해야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며 시오니즘 탄생... 랍비를 활용한 특수 교육법으로 역대 노벨상 수상자 약 20% 배출
흰옷을 즐겨 입고 평화를 숭상하며 살아온 한국인은 유대인과 동질감을 느끼는 편이다. 소수 민족으로 강대국의 틈바니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왔을 뿐 아니라 생명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한국인과 유대인 모두 머리가 좋고 근면성실하다는 점도 내세운다. 1901년부터 2025년까지 노벨상을 받은 유대인은 약 200명이며 전체 수상자의 20%를 넘는다.
전 세계 인구의 0.2%로 적은데 어떻게 우수한 인재가 많은지 궁금하다. 한민족은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을 제외한 과학 분야의 수상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유대인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국을 떠나유랑생활을 영위했지만 한민족은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차이가 있다. 유대인은 발상지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과 정착촌 건설을 위한 갈등이 불가피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스람교의 성지가 있어 종교전쟁의 중심지이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요람이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한계와 극복 노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자행한 마녀사냥(witch-hunt) 장면 [출처=위키피디아]
◇ 2000년 동안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 정서... 중세 유렵에서 마녀 사냥의 대상으로 전락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달리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동족이며 기독교 창시자인 예수(Jesus)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기독교도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2000년 동안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유지됐다. 유대인이 오랜 세월 동안 박해를 받은 것은 종교적 배타성, 부의 축적 과정에 대한 비판, 정치적 특권의 향유 등으로 요약된다.
유대인이 주로 이주한 유럽은 기독교인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데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를 우호적으로 볼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로마 시대에 이집트로 이주한 유대인은 특유의 근면성과 재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주민이 토착민에 비해 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유럽에서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반유대주의 풍조가 물리적 갈등으로 연결됐다.
11세기 유럽에서 최초의 반유대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182년 자국민과 갈등을 일으키는 유대인을 추방했다. 영국은 13세기, 스페인은 15세기, 이탈리아는 16세기에 각각 유대인을 외국으로 몰아냈다.
스페인은 15~16세기 종교재판(Inquisition)과 병행하며 악랄한 수단으로 탄압을 자행했다. 유대인은 ‘저주를 받은 자’ 또는 스페인어로 ‘돼지’라는 뜻의 ‘마라노(marrano)’라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1491년 6명의 유대인 남자와 1명의 유대인 여자가 산채로 화형식에 처해졌다. 극단젇인 탄압과 공포는 개종으로 현지에 정착하거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주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로 이어졌다.
악랄한 종교재판이 진행되며 15만 명의 유대인 중 5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witch-hunt)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됐지만 전염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기득권층의 전시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위생 관념이 낮은 유대인이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을 옮긴다는 주장도 미신에 근거한 속설이었다. 부유한 유대인을 처형하며 재산을 약탈해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할 수 있어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포그롬(pogrom)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포그롬은 ‘파괴’, ‘학살’, ‘폭력적으로 파괴하다’ 등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다.
정부가 허가하거나 묵인하는 조건으로 군중이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으로 소수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 혹은 약탈했다.
유대인이 러시아 민중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것은 귀족의 교활한 통치술 때문이었다. 귀족은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농노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을 관리인으로 내세웠다.
유대인은 누구에게 땅을 빌려줄지 결정하고 소작료를 거둬 귀족에게 바쳤다. 가난한 농노는 땅을 소유한 귀족보다 정해진 소작료를 악착같이 거두는 유대인이 더 나쁘다고 인식했다.
제정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이 초래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 거주 유대인에게 집단 공격은 폭풍처럼 다가왔다. 정부가 폭력 사태를 용인했다는 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서유럽에서 박해를 받은 유대인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으로 이주하지만 그곳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당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역사에 기인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럽 유대인은 미국, 캐나다 등으로 떠났다. 유럽에서 언제 다시 극우주의 열풍이 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 이후에도 나치의 추종자들은 반민족적, 반인종적 테러를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1991년 소연방이 붕괴된 이후 극우주의 세력이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며 시오니즘 탄생... 영국의 '벨푸어 선언'이 촉매제 역할하며 증폭
18세기 서유럽에서 인본주의를 중시한 계몽주의가 유행하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졌다. 게토(Ghetto)와 같은 거주지역 제한이나 특별세금과 같은 의무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파시즘(fascism)이 유행하며 반유대주의가 부활했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2000년 전 조상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시오니즘(Zioism)’을 외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유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채택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이 설립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는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고 영국 유대인 공동체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에게 보내는 서한에 포함된 문서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유대인의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인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아랍의 정치지도자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sein)에게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영국의 이중 외교정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노록 만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라엘은 영국의 일방적인 위임통지 종료 선언 이후 1948년 건국됐다. 1950년 귀환법을 제정해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모두 유대인으로 잔주해 이민을 허용했다. 유대인 이민자와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도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134개 국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약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국민이 2025년 기준 951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해외 거주 유대인이 본국 인구보다 2배나 많은 셈이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저축·교육·네트워크로 촘촘한 디아스포라 구축... 랍비를 활용한 특수 교육법으로 유능한 인재 육성
유대인은 근검절약해 저축률이 높고 자녀 교육에 열정을 쏟는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끈끈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거미줄처럼 엮인 네트워크는 사업의 승패를 좌우할 정보 교류망으로 작용했다.
해외 중국인이나 유대인은 모국어를 잊지 않고 배우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있는 디아스포라와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유대인의 사업이 금융, 무역, 점포 운영 등으로 해외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련된 정보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가치가 있는 정보를 교류하는 네트워크망은 구축보다 운용이 더 중요하다. 언어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인식, 사람과 사회에 대한 철학 등을 공유해야 효율성이 높아진다. 유대인은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종합적인 판단력까지 갖추면서 무역과 상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은 5세기경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으며 주로 상업과 농업에 종사했다. 이슬람 세력이 711년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은 번영을 구가했다.
무슬림 세력은 현지 사정에 밝은 유대인을 중재자로 내세워 지역을 통치했다. 13~15세기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무역을 장악하며 이베리아반도의 경제, 문화를 이끌었다.
유대인은 종교적 배타성과 사회적 영향력에도 거주국 주민과 화합하는 데 실패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후 옮겨간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유럽의 변방으로 궁벽한 불모지에 불과했던 이들 국가를 세계적인 무역, 경제, 금융의 중심지로 키웠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은 환금성이 높고 고가상품인 소금, 향신료 등의 무역을 독점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중앙은행 등의 제도를 만든 것도 유대인이다. 네덜란드는 유대인 덕분에 금융시스템을 정비해 대항해 시대에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유대인의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탈무드(Talmud)다. 탈무드는 200년 경 랍비(Rabi)인 예후다 하나시(Yehuda ha-Nasi)가 편찬한 종교적 법류집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내용과 해설을 모아 집대성했다.
랍비는 ‘나의 선생님’ 혹은 ‘나의 주인님’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유대교에서 ‘현인(賢人) 즉 ’깨달음을 얻어 성인 다음으로 가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탈무드 교육의 핵심은 랍비에 있다, 랍비는 탈무드에 기록된 내용을 글자 그대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적용할지 설명한다. 동일한 내용도 랍비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다양한 논리의 개발에 도움이 된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가며 다양한 대응 논리를 찾고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랍비들은 자신의 의견을 추가로 수록하며 탈무드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유대인의 토론 교육을 하브루타(Havruta)라고 하는데 ’친구‘ 혹은 ’동반자‘라는 의미다. 학생이 서로 짝을 만들어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한다. 나이, 성별, 계급 등을 무시하고 짝을 이루도록 유도한다.
질문은 단답형이 아니라 개방형으로 하도록 유도하며 교사는 학생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지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과거에는 2인이 팀을 이루는 형식을 지칭했지만 현대에는 2~5명 단위로 구성한다.
탈무드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교재로 활용된다. 유대인 공동체가 너무 작아 정규 학교를 설립하거나 운영하기 어려울 상황에서도 교회나 가정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계속 -
일부 사람들은 한국인과 유대인 모두 머리가 좋고 근면성실하다는 점도 내세운다. 1901년부터 2025년까지 노벨상을 받은 유대인은 약 200명이며 전체 수상자의 20%를 넘는다.
전 세계 인구의 0.2%로 적은데 어떻게 우수한 인재가 많은지 궁금하다. 한민족은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을 제외한 과학 분야의 수상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유대인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국을 떠나유랑생활을 영위했지만 한민족은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차이가 있다. 유대인은 발상지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과 정착촌 건설을 위한 갈등이 불가피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스람교의 성지가 있어 종교전쟁의 중심지이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요람이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한계와 극복 노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자행한 마녀사냥(witch-hunt) 장면 [출처=위키피디아]
◇ 2000년 동안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 정서... 중세 유렵에서 마녀 사냥의 대상으로 전락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달리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동족이며 기독교 창시자인 예수(Jesus)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기독교도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2000년 동안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유지됐다. 유대인이 오랜 세월 동안 박해를 받은 것은 종교적 배타성, 부의 축적 과정에 대한 비판, 정치적 특권의 향유 등으로 요약된다.
유대인이 주로 이주한 유럽은 기독교인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데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를 우호적으로 볼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로마 시대에 이집트로 이주한 유대인은 특유의 근면성과 재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주민이 토착민에 비해 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유럽에서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반유대주의 풍조가 물리적 갈등으로 연결됐다.
11세기 유럽에서 최초의 반유대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182년 자국민과 갈등을 일으키는 유대인을 추방했다. 영국은 13세기, 스페인은 15세기, 이탈리아는 16세기에 각각 유대인을 외국으로 몰아냈다.
스페인은 15~16세기 종교재판(Inquisition)과 병행하며 악랄한 수단으로 탄압을 자행했다. 유대인은 ‘저주를 받은 자’ 또는 스페인어로 ‘돼지’라는 뜻의 ‘마라노(marrano)’라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1491년 6명의 유대인 남자와 1명의 유대인 여자가 산채로 화형식에 처해졌다. 극단젇인 탄압과 공포는 개종으로 현지에 정착하거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주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로 이어졌다.
악랄한 종교재판이 진행되며 15만 명의 유대인 중 5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witch-hunt)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됐지만 전염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기득권층의 전시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위생 관념이 낮은 유대인이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을 옮긴다는 주장도 미신에 근거한 속설이었다. 부유한 유대인을 처형하며 재산을 약탈해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할 수 있어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포그롬(pogrom)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포그롬은 ‘파괴’, ‘학살’, ‘폭력적으로 파괴하다’ 등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다.
정부가 허가하거나 묵인하는 조건으로 군중이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으로 소수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 혹은 약탈했다.
유대인이 러시아 민중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것은 귀족의 교활한 통치술 때문이었다. 귀족은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농노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을 관리인으로 내세웠다.
유대인은 누구에게 땅을 빌려줄지 결정하고 소작료를 거둬 귀족에게 바쳤다. 가난한 농노는 땅을 소유한 귀족보다 정해진 소작료를 악착같이 거두는 유대인이 더 나쁘다고 인식했다.
제정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이 초래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 거주 유대인에게 집단 공격은 폭풍처럼 다가왔다. 정부가 폭력 사태를 용인했다는 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서유럽에서 박해를 받은 유대인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으로 이주하지만 그곳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당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역사에 기인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럽 유대인은 미국, 캐나다 등으로 떠났다. 유럽에서 언제 다시 극우주의 열풍이 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 이후에도 나치의 추종자들은 반민족적, 반인종적 테러를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1991년 소연방이 붕괴된 이후 극우주의 세력이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며 시오니즘 탄생... 영국의 '벨푸어 선언'이 촉매제 역할하며 증폭
18세기 서유럽에서 인본주의를 중시한 계몽주의가 유행하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졌다. 게토(Ghetto)와 같은 거주지역 제한이나 특별세금과 같은 의무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파시즘(fascism)이 유행하며 반유대주의가 부활했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2000년 전 조상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시오니즘(Zioism)’을 외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유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채택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이 설립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는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고 영국 유대인 공동체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에게 보내는 서한에 포함된 문서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유대인의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인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아랍의 정치지도자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sein)에게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영국의 이중 외교정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노록 만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라엘은 영국의 일방적인 위임통지 종료 선언 이후 1948년 건국됐다. 1950년 귀환법을 제정해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모두 유대인으로 잔주해 이민을 허용했다. 유대인 이민자와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도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134개 국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약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국민이 2025년 기준 951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해외 거주 유대인이 본국 인구보다 2배나 많은 셈이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저축·교육·네트워크로 촘촘한 디아스포라 구축... 랍비를 활용한 특수 교육법으로 유능한 인재 육성
유대인은 근검절약해 저축률이 높고 자녀 교육에 열정을 쏟는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끈끈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거미줄처럼 엮인 네트워크는 사업의 승패를 좌우할 정보 교류망으로 작용했다.
해외 중국인이나 유대인은 모국어를 잊지 않고 배우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있는 디아스포라와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유대인의 사업이 금융, 무역, 점포 운영 등으로 해외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련된 정보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가치가 있는 정보를 교류하는 네트워크망은 구축보다 운용이 더 중요하다. 언어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인식, 사람과 사회에 대한 철학 등을 공유해야 효율성이 높아진다. 유대인은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종합적인 판단력까지 갖추면서 무역과 상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은 5세기경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으며 주로 상업과 농업에 종사했다. 이슬람 세력이 711년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은 번영을 구가했다.
무슬림 세력은 현지 사정에 밝은 유대인을 중재자로 내세워 지역을 통치했다. 13~15세기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무역을 장악하며 이베리아반도의 경제, 문화를 이끌었다.
유대인은 종교적 배타성과 사회적 영향력에도 거주국 주민과 화합하는 데 실패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후 옮겨간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유럽의 변방으로 궁벽한 불모지에 불과했던 이들 국가를 세계적인 무역, 경제, 금융의 중심지로 키웠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은 환금성이 높고 고가상품인 소금, 향신료 등의 무역을 독점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중앙은행 등의 제도를 만든 것도 유대인이다. 네덜란드는 유대인 덕분에 금융시스템을 정비해 대항해 시대에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유대인의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탈무드(Talmud)다. 탈무드는 200년 경 랍비(Rabi)인 예후다 하나시(Yehuda ha-Nasi)가 편찬한 종교적 법류집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내용과 해설을 모아 집대성했다.
랍비는 ‘나의 선생님’ 혹은 ‘나의 주인님’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유대교에서 ‘현인(賢人) 즉 ’깨달음을 얻어 성인 다음으로 가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탈무드 교육의 핵심은 랍비에 있다, 랍비는 탈무드에 기록된 내용을 글자 그대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적용할지 설명한다. 동일한 내용도 랍비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다양한 논리의 개발에 도움이 된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가며 다양한 대응 논리를 찾고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랍비들은 자신의 의견을 추가로 수록하며 탈무드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유대인의 토론 교육을 하브루타(Havruta)라고 하는데 ’친구‘ 혹은 ’동반자‘라는 의미다. 학생이 서로 짝을 만들어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한다. 나이, 성별, 계급 등을 무시하고 짝을 이루도록 유도한다.
질문은 단답형이 아니라 개방형으로 하도록 유도하며 교사는 학생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지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과거에는 2인이 팀을 이루는 형식을 지칭했지만 현대에는 2~5명 단위로 구성한다.
탈무드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교재로 활용된다. 유대인 공동체가 너무 작아 정규 학교를 설립하거나 운영하기 어려울 상황에서도 교회나 가정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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