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2. 이산가족의 정의와 한반도 역사... 자발적으로 가족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 생활하는 사람
고려 초기부터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생성... 전쟁 포로부터 시작해 강제노동자까지 시대에 따라 변천
민진규 대기자
2026-08-12 오후 10:19:32
1977년 미국 ABC 방송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뿌리(Roots)’는 이산가족의 삶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프리카 감비아(Gambia) 출신 ‘쿤타 킨테(Kunta Kinte)’가 1767년 미국 버지니아 농장에 팔려 간 이후 후손이 흑인 노예로서 겪은 여정을 다뤘다.

아프리카 노예사냥은 포르투갈인이 주도했으며 아랍인이 앞잡이로 동원됐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20세기 들어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과 식민지 해방과 민족해방을 겪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대량으로 양산됐다.

20세기를 ‘실향민의 세기(century of the uprooted)’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산가족이라는 용어의 개념부터 어던 종류의 이산가족이 형성되었는지 정리해보자.


▲ 1977년 미국 ABC 방송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뿌리(Roots)’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 이산가족의 개념과 확장... 자발적으로 가족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 생활하는 사람

가족(家族)은 ‘혈연 또는 혼인으로 관계돼 같이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람의 집단’을 말한다. 흔히 가족이라고 하면 식구(食口)로 ‘한집에서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식구와 식솔(食率)은 같은 의미다.

우리나라 민법에서 정의하는 가족도 비슷한 개념으로 접근한다. 가족은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정된다.

이산가족(離散家族)은 ‘가족의 구성원 중 일부가 전쟁, 자연재해 등 외부적 요인으로 흩어져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가족’이라고 정의된다. 흉년, 폭설, 폭우, 화산 폭발, 지진 등 자연재해보다는 전쟁이 이산가족을 만드는 주요인에 속한다.

일부 전문가는 학업, 직장 등으로 가족과 정기적인 교류를 갖지 못하는 가정도 이산가족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업이나 직장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주거지가 달라진 경우이므로 엄밀하게 보면 이산가족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공부나 돈을 벌러 가서 장기간 가족과 이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도인이 영국의 식민지나 중동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후 생활 경비를 줄이기 위해 고국의 가족과 생이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몽골, 베트남, 미얀마 등지의 노동자가 입국한 후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오랜 기간 머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출국하면 다시는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기 때문에 체포돼 강제로 추방당할 때까지 자발적 이산가족으로 살아간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고려 초기부터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생성... 전쟁 포로부터 시작해 강제노동자까지 시대에 따라 변천

한반도에서 강제적 이산가족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건국 초기 거란족이 침입했다. 거란족은 916년 요(遼)나라를 건국하고 925년 발해를 멸망시켰다.

고려는 송(宋)과 외교 관계를 맺고 요를 대립해 3차에 걸친 침입을 당했다. 침입자를 격퇴했지만 전쟁 중 수많은 고려인이 거란으로 끌려갔다.

몽고의 초원에서 시작해 중국 대륙을 정벌한 원(元)은 거란족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정벌했다. 고려에 젊은 여성을 공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공녀제도((貢女制度)로 약 80년 동안 공식 및 비공식으로 끌려간 여성이 2000명을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 말기 중국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족 무리인 홍건적(紅巾賊)이 원과 패권 다툼에서 밀려 고려를 침공했다. 1차 침공에서 4만여 명, 2차 침공에서 20만여 명이 몰려왔으나 고려는 이를 격퇴했다.

고려인의 피해도 3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는 주민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지 않은 고려인이 포로로 잡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됐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대규모 이산가족 발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숫자가 대략 10~20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부는 나가사키에 온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 중국 남부 마카오까지 끌려갔다.

1598년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칼레티는 ‘나의 세계일주기(Ragionamenti di Francesco Carletti Fiorentino sopra le cose da lui vedute ne’suioi viaggi si dell’Indie Occidentali, e Orientali Come d’altri Paesi)‘라는 책에 조선인 노예를 기록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에서 데려온 노예를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판매해 노예 가격이 폭락했다고 한다. 동양인 노예가 저렴해 이탈리아 상인은 5명의 노예를 구입해 피렌체까지 데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1642년 일본 나가사키 히라도마치(平戶町)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高麗)에서 출생한 사람이 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데리고 온 노예의 집단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을 고려로 표기했다.

중국 대륙에서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靑)을 건국한 만주족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에 원군을 보내 준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청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무력으로 대응했지만 50일도 버티지 못하고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대가는 참혹해 10~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노예로 끌려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끌려간 조선인은 추운 만주에서 참혹한 노예 생활을 견뎌 내야 했다. 일부는 탈출해 귀국했지만 대부분은 현지에서 동화되어 삶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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