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9. 일본국 재일동포의 역사와 고민... 정착 노력과 해방 이후 인식 변화로 귀화자 급증
강제 병합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 해방 이후에도 귀국 포기한 동포가 60만 명을 넘어
민진규 대기자
2026-07-27
일본과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을 듣는 관계다. 고대부터 한반도를 통해 중국 대륙의 문화를 전수받은 일본은 한국인에게 우호적이었다.

현재 일본 국인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황실의 뿌리도 백제의 유민일 정도로 양국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섬나라인 일본은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토지와 잦은 기상재해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고대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교역에 필요한 특산물이 없어 주변국을 약탈하는 해적질로 식량을 확보했다.

삼국시대부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 해안 지역을 침략했으며 임진왜란으로 조선 점령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당시 수십만 명의 양민을 포로로 끌고 간 일본은 은 제련술, 도자기 제조 등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기술은 때마침 대항해의 시대를 연 포르투갈 상인과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 일본의 방첩기관인 공안조사청 청사 [출처=위키피디아]

◇ 한일합방 이후 재일동포의 이주 본격화... 해방 이후에도 귀국 포기한 동포가 60만 명을 넘어 

조선인이 일본으로 이주한 출발점은 한일 강제병합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을 없애며 강제로 병합했다.

을사늑약은 표면적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넘기는 형식을 취했지만 외교권과 군사권을 잃은 대한제국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일본으로 한인의 이주 역사는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910~1945년 식민 통치와 강제 연행으로 설명된다. 식민지 초기에 조선인 중 일본으로 가는 유학생이 많았다. 양반이나 부자를 중심으로 근대화를 먼저 경험한 일본이 신문물과 학문을 받아들이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확대하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 근무할 현장 노동자가 부족해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은 정책적, 조직적, 집단적, 폭력적, 계획적인 노동자 확보정책이라고 봐야 한다. 동원된 노무자는 일본 뿐 아니라 중국, 남사할린, 동남아시아, 태평양 도서 등으로 배치됐다.

노무자는 군수공장, 군 공사장, 토목건축 현장, 석탄 광산, 금속 광산, 항만 운수시설 및 집단농장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렸다. 남성은 석탄 광산에서 일했으며 여자도 ’여자근로정신대‘라는 명목으로 군수공장에 끌려갔다.

2단계 1945~1965년 해방과 귀국의 시기는 재일동포의 입장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시기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며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기준 일본에 약 22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6년 3월까지 약 135만 명의 재일동포가 귀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일본 정부는 1946년 이후 1인당 1000엔을 초과하는 현금이나 화물을 갖고 출국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오랜 기간 동안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축적한 재산의 반출이 금지되자 약 60만 명은 귀국을 포기했다.

1959년 12월부터 재일 조선인 중 일부가 북한으로 귀국을 선택했다. 1959년 975명을 시작으로 1962년까지 7만7288명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북한과 일본 정부가 추진한 ’재일조선인북한귀국사업‘을 일환으로 북송선을 탄 사람들이다.

북한은 6·25 전쟁 이후 경제를 복구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 정부는 1952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으로 국적을 상실한 재일 조선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해결책이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하기도 강제 추방도 선택하기 어려웠다. 북한 정부는 ’살기 좋은 북한 땅으로 귀국을 환영한다‘며 이들의 귀국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는 북한이 사회주의국가로 복지제도가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지상낙원이 아니라고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84년까지 재일동포와 그들의 일본인 가족 9만3000명이 이주 행렬에 동참했다. 2026년 5월 현재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생모인 고영희도 재일동포 이주민 출신이다.

남한으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 국가복지정책에서 배제, 가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자녀의 공립학교 입학이나 취업도 쉽지 않았다.

3단계 1965~1980년 한일 협정과 남북 대립으로 재일조선인은 북한보다 한국에 더 우호적으로 변했다.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며 재일조선인은 법적으로 영주권을 부여받았다.

한일협정에 ’다년간 일본에 정주해온 한국인과 그 후손들에게 일본 영주를 인정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모두 재일동포에 대해 문제의식이나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협정 이후 재일조선인 중 한국 국적을 선택한 사람이 대폭 증가했다. 한국 정부는 1975년부터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계열의 조선인에게도 고향 성묘 방문을 허락했다.

4단계 1980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국제화와 다문화 공생 정책으로 재일동포의 권익이 향상됐다.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경제력이 향상됐다. 세계 각지로 기업이 진출하고 외국인의 이주가 늘어나며 소수자인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도 무뎌졌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오키나와, 홋카이도 등의 주민을 받아들이며 단일민족인 야마토민족(大和民族)만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렸다.

본토 이외의 민족은 기존에 사용하는 성(姓)은 사용하지 못했다. 현재도 성씨만 보고도 어느 민족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 한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이북5도 청사 이미지 [출처=홈페이지]

◇ 강제 병합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 차별과 착취로 고통받았이지만 생존을 위해 투쟁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후 토지를 수탈해 식량 공급지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노동자를 농민으로 채웠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토지를 잃은 조선인도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동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후 토지를 수탈해 식량 공급지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노동자를 농민으로 채웠으므로 농촌에서 일손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도시에 대한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유럽 각국이 산업혁명을 추진하며 식량 공급지로 식민지를 개척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1929년 터진 세계 대공항 이후 경기 불황과 실업으로 조선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한반도 북부보다 남부 지역인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등의 출신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특히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토지가 부족해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제주 출신의 비율이 높았다.

이주자들은 현지에서 먼저 정착한 친척 또는 친구의 소개로 일자리를 찾았다.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거주국 주민과 경쟁해야 하므로 공식적인 방법으로 직업을 얻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일본으로 간 조선인에게는 혈연이나 지연 등의 연고가 중요한 생존조건인 셈이다.

더 윤택한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대부분 일용 노동자나 광부, 건설 노동자로 열악한 근로 환경에서 일하며 저임금을 받았다.

그렇지만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한반도에 비해서 삶이 나았다. 강제이주자와 자발적인 노동자 모두 차별과 착취에 시달린 것은 마찬가지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정착 노력과 해방 이후 인식 변화로 귀화자 급증... 파친코·요식업 등 자영업을 중심으로 생업 전선 구축해 

섬나라인 일본은 바쿠후(幕府) 시대에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신분제가 엄격해 조선인 이주민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피식민지의 일반인 신분으로 일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처절한 생존 투쟁은 불가피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으로 행동했다. 초기 일본에 도착한 조선인은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에 정착하게 된다. 개인에서 출발한 이후 가족 단위의 이주가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에게는 집을 빌려주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이었지만 대규모 공장의 사택이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차별을 이겨냈다.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은 1922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인은 일본인이 꺼리는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각종 공사장의 토공, 항만공사장의 짐꾼, 역의 짐꾼, 공장의 잡역 등으로 다양했다. 임금도 일본인에 비해 적었으며 2~3개월씩 밀리기 일쑤였다. 고용주는 급여에서 식비, 기타 경비 등을 공제하고 잔액만 지급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귀국을 포기한 60만 명의 재일동포의 직업도 전쟁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재일동포는 학교를 졸업해도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고 공기업에 취직도 어려웠다. 민간 기업도 조선인의 고용을 꺼려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기업에 취직이 되지 않자 부모와 같이 자영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도인 도쿄 신주쿠 지역에 있는 불고깃집의 주인도 대부분 재일동포다.

자영업 중에서도 불고깃집, 쌀집, 파친코 가게 등이 재일동포가 선택하는 대표적인 점포다. 특히 파친코는 법률상으로는 도박이 아닌 오락으로 분류되지만 실질적으로 도박장에 가깝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분리되면서 재일한인사회도 갈라섰다.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은 한국 정부가 인정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國民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역대 한국 정부도 1975년 전까지 사회주의국가인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추진한 경제개발의 성과가 나오고 한국이 북한에 비해 더 발전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북한에 우호적인 재일동포는 줄어들었다.

또한 지상낙원을 찾아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의 실상이 속속들이 알려진 것도 한국을 부정적으로 보던 재일동포마저 전향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선전 선동에 넘어간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970년대 이후 남한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며 일본 사회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민 1세대가 사망하고 2~3세로 넘어오며 정체성을 상실하며 재일동포라는 것조차 잊고 사는 후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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