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문화] 1편 대기업 18. 코오롱 기업문화 (1) 역사와 이슈...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수입하고 생산해 의복혁명 주도
1.5세인 이동찬 명예회장은 국내 마라톤진흥을 위해 노력... 3세 경영인인 이웅열 회장은 취임 이후 내우외환에 시달려
민진규 대기자
2013-10-21
SK그룹과 같이 한국 섬유산업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코오롱그룹(이하 코오롱)은 창업주 이원만 회장과 아들 이동찬 회장이 공동 창업한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공기업을 제외하고 2012년 말 기준으로 재계서열 32위인 코오롱은 1996년부터 이동찬 회장의 장남인 이웅열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룹규모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높은 편이지만 3세 경영자인 이웅열 회장이 맡은 이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998년 IMF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주력 사업은 부진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진하고 있는 태양열발전, LED조명, 수처리 사업 등은 진척이 더디다. 


◇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수입하고 생산해 의복혁명 주도

1953년 한국에 최초로 나일론을 공급한 이원만 회장은 한국 동포들에게 값싸고 질긴 의복을 제공하자는 일념으로 회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사업의 기반을 구축한 후 한국 동포들에게도 혜택을 제공하고자 한국에 나일론 공장을 설립했다.

나일론은 1939년 미국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처음 소개된 합성섬유이다. 천연섬유에만 의존하면서 만성적인 부족현상에 시달리던 의복소재 문제를 해결해 준 
기적의 섬유로 불린다. 

2차 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에서 1950년대 초 나일론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이원만 회장은1951년 삼경물산를 설립해 국내에 독점공급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6∙25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일론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나일론을 수입판매만 할 경우 일본 업체들의 배만 불린다고 판단한 이원만 회장은 국내에 생산공장 건립을 추진했다. 1964년 한국나이론 공장의 원사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면서 한국의 섬유역사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시대흐름을 잘 파악했던 이원만 회장은 정작 기업경영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다. 1950년대 나일론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1960년 4∙19학생의거 이후 혼란한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잘 넘겼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업과 산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울 구로와 경북 구미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도록 조언했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원만 회장은 정치인으로 나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기업인으로 합성섬유산업에 끼친 영향보다는 남긴 흔적은 적다. 이런 점에서 정치인보다는 기업인으로 외길을 걸었다면 코오롱이 섬유업으로 출발한 SK그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찌되었건 그는 창업 1세대 경영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업보국을 자세를 견지하면서 기업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는 초심은 잃지 않았다. 코오롱이 원사와 패션 등 섬유산업의 외길을 걷게 된 것도 창업자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1.5세인 이동찬 명예회장은 국내 마라톤진흥을 위해 노력

창업자 이원만 회장이 한국 섬유공업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라면 아들인 이동찬 회장은 이를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다. 이원만 회장이 기업경영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뒀기 때문에, 국내사업은 초기부터 이원만 회장의 동생 이원천 회장과 이동찬 회장이 주도했다.

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 회장과 아들 조석래 회장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조홍제 회장이 청춘을 다 바친 삼성그룹과의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효성그룹을 창업할 때 아들 조석래 회장의 조력이 컸다. 이동찬 회장과 조석래 회장을 2세 경영인이라기보다는 1.5세 경영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코오롱은 1964년부터 한국나이론 공장에서 원사생산을 시작했지만, 그룹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1977년이다. 이 때 한국나일론과 한국포리에스텔을 합병해 코오롱을 설립했으며, 이동찬 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섰다.

이전까지는 1957년 코오롱에 입사했던 이원만 회장의 동생인 이원천 코오롱TNS회장이 코오롱의 대표역할을 수행했었다. 당시 이원천 회장은 형인 이원만 회장의 결정에 반발해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원진레이온은 비스코스인견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는데, 1980년대 노동자들이 안전 장비 없이 작업을 함으로써 인체에 치명적인 물질인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어 다수가 사망한 기업이다. 


이동찬 회장은 코오롱의 대표가 된 이후 섬유와 무역에 치우쳐 있던 사업구조를 건설, 화학, 전자소재, 이동통신 등으로 확대했다.

이동찬 회장이 확장한 사업들은 현재 뚜렷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건설사업은 코오롱건설에서 코오롱글로벌로 이관되었지만 무리한 PF투자로 그룹 부실의 뇌관이 되고 있다.

1994년 포크코와 공동 대주주로 이동통신산업으로 시작했지만, 신세기통신의 경영에 대한 이견으로 1999년 SK텔레콤에게 대주주를 넘겼다. 당시 머리가 두 개라서 기업경영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동찬 회장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라는 말을 좋아해 마라톤을 좋아한다고 한다. 승리를 위해 일정한 페이스로 힘차게 달려가는 마라톤이 단숨에 빨리가 아니라 정돌 쉼 없이 멀리 달리는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1977년 코오롱의 경영권을 넘겨받기 이전까지 35년 동안 삼촌인 이원천 회장 밑에서 묵묵히 참고 견디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현실에 접목시키기 위해 마라톤 진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1년 이동찬 회장은 마라톤의 발전을 위해 2시간 10분내 1억 원, 15분 이내 5천 만원이라는 거금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987년에는 코오롱 마라톤팀이 발족시켰다.

그의 꾸준한 지원덕분에 1992년 코오롱마라톤 팀의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1936년 일제 강점기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후 처음으로 전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코오롱이라는 그룹이 마라톤과 연상되는 이유가 이동찬 회장의 인생철학 때문이었다. 


코오롱이 이동찬 회장의 경영기간 동안 사업다각화에 성공하고, 마라톤 중흥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지만 사업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1996년 이동찬 회장은 20 여년 간 경영하던 코오롱의 경영권을 건강과 관계없이 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넘겼다. 다른 그룹의 회장들이 죽을 때까지 경영권을 고집하다가 사후에야 경영을 넘기던 관행과는 차이가 많다.

이동찬 회장이 퇴임한 이후 코오롱의 마라톤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어 한국 마라톤도 침체기에 접어든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3세 경영인인 이웅열 회장은 취임 이후 내우외환에 시달려

1996년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물려 받은 이웅열 회장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회장으로 취임하던 당시 나이가 만 40세로 대기업을 경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다른 그룹의 회장들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기업경영에 전념했지만 실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1997년 IMF외환위기가 터졌고, 2000년을 전후해 중국기업들이 부상하면서 실적악화로 국내 섬유업체들이 도산이 이어졌다. 당시 많은 섬유업체들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추진했던 휘장사업권에 코오롱TNS가 연루되었다. 2001년 코오롱TNS가 휘장사업권을 넘겨 받기 위해 정∙관계에 불법 로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코오롱TNS는 사업부진으로 부도 처리되었다.

당시 코오롱TNS는 104개 하청업체로부터 174억 원 상당의 휘장상품을 납품 받은 후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관련 혐의로 이동보 코오롱TNS회장과 경영진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동보는 이동찬 회장의 동생이지만 코오롱TNS는 코오롱에서 계열분리된 기업이다. 2004년에는 코오롱캐피탈의 473억 원 규모의 횡령사건이 터졌다. 


최근에도 전직 대통령의 형의 정치자금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글로벌 기업인 듀폰과 특허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1심에서 패소했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재판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

MB정권이 추진했던 4대강 사업의 수 처리 설비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로비를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으며, MB정부가 추진하다가 전국민의 반대로 접었던 상하수도 민자사업도 코오롱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MB정부의 최고 실세였던 이상득 의원이 코오롱사장 출신이기 때문에 MB정권과 밀착해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MB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해 조사를 강화하고 있으며, 건설공사뿐만 아니라 수질개선사업에 관련된 수 처리 회사들도 담합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코오롱글로벌, 코오롱워터텍 등 관계사들도 담합, 불법로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웅열 회장은 본인 스스로 21세기 비전크리에이터로 지칭하고 직함도 CVC(Chief Vision Creator)로 부른다. CVC는 궁극적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코오롱을 라이프스타일을 혁신시키는 LifeStyle Innovator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코오롱은 주력기업의 실적악화, 신성장동력의 부재, 정치사건의 연루 등으로 내우외환에 빠졌다. 취임 당시 불혹(不惑)에 불과했지만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서 이제 이순(耳順)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웅열 회장이 하늘의 뜻을 알고, 세상의 흐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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