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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이라는 기업의 이미지는 섬유회사와 마라톤이 강하다. 나일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기업이니 섬유가 회사의 이미지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마라톤이 연상되는 것은 이동찬 회장의 노력 덕분이다.이동찬 회장이 마라톤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코오롱이 후원하고 육성한 황영조와 이봉주 등은 한국 마라톤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사람들이 먹고 살만하면서 마라톤에 대한 열기도 사라졌고, 스포츠 종목이라기 보다는 생활체육으로 자리매김했다. 마라톤에 대한 사회적 열기가 사라진 것처럼 코오롱의 사업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마라톤의 진정한 묘미를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현 이웅열 회장의 아버지인 이동찬 회장은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아버지 이원만 회장과 삼촌인 이원천 회장의 그늘 아래에서 오랫동안 실력을 쌓으며 1인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2인자의 삶이라는 것은 언뜻 화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권도 없고 책임만 있는 자리이다.조직의 실적이 나쁘거나 1인자의 리더십에 문제가 생기면 2인자가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된다. 2인자 중에서는 언젠가는 1인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영원히 1인자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 2인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국가나 가정 모두 장자세습이라는 전통이 생겼다. 국가나 가정에 1인자는 1명뿐이기 때문에 2인자는 1인자가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왕이나 조직의 수장이 죽어야 그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개인마다 수명이 다르기 때문에 2인자는 1인자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초조하게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운(?) 좋게 1인자가 빨리 죽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평생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현란한 수사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정신고문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동안 굳세게 버티면서 묵묵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마라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볼 수 있다.대기업 오너의 자식들이 경영권을 물려 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을 마라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어렵지도 않고, 고통을 감내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찬 회장은 본인도 한창 일을 할 나이에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 준다. 명예롭게 은퇴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회장 자리만 쳐다보고 있는 자식이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자리를 물려 줘야 하는데 빨리 자리를 물려 받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소신껏 경영을 해 보라는 배려일 수도 있다.어떤 의도를 가졌던 크게 성공한 의사결정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웅열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기존 사업도 특별한 진전이 없고, 새롭게 선택한 사업도 미래의 성장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전문 마라토너가 아닌 일반인이 마라톤에서 완주하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옹이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것은 한국인의 자랑이라고 설명했다.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는 점도 소개했다. 이후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면서 일반인 사이에도 등산과 마라톤이 엄청나게 확산했다고 덧붙였다.IMF외환위기 이후 인생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일반인들이 마라톤에 많이 도전하고 있다. 인생을 바친 기업이 나의 인생을 보호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국내 대기업 후계자 중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이런 절박한 심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죽도록 노력을 해 부모가 물려준 기업과 직원들의 인생을 보호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워 본적이 있을까? 만약 이동찬 회장이나 이웅열 회장이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코오롱의 현재는 지금과는 달랐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적당주의 문화 척결로 한 단계 도약을 꿈꾼다 이웅열 회장은 그룹 내에 만연한 적당주의 문화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오롱뿐만 아니라 국내 공조직, 사조직 모두 적당주의 문화가 만연되어 있어 제품개발도, 업무처리도‘대충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발전이 없다.이웅열 회장이 적당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은 좋은 말이지만 실천전략이 모호하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고, 잘못된 것도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하는 식으로 적당주의를 타파하자고 주장한다. 승진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어 있어 동료의 단점을 찾기 바쁜데 단점을 보완해 주라고 하면 황당하게 여길 것이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소신 없이 현상유지로 사는 것이 유리한 대기업의 직원들이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그리고 연공서열이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고, 업무상 작은 실수로도 승진에서 밀리고 해고될 수 있는데 실수를 고백할 멍청한 직원은 없을 것으로 본다. 적당주의를 없애야 조직이 발전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되지만 실행방안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현재 국내 최고의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는 삼성그룹도 적당주의 팽배했던 조직이다. 이건희 회장은 ‘일류삼성’이라는 슬로건을 내 세우며 직원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 적당주의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국내 1등을 넘어 글로벌 1등이 되기 위해 철저히 1등을 연구했다. 내부의 토론이나 실수를 지적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1등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주고, 무조건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것이다. 최고의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는다.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에서 쟁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모방의 정도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제품을 철저하게 연구한 후 베낄 수 있는 것은 모두 베꼈다. 디자인, 기능, 마케팅 전략 등 도의적으로는 문제가 되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모방한 결과 애플을 넘을 수 있었다.아직 법적 분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삼성전자는 애플의 따라 잡겠다는 목표를 이뤘다. 삼성전자는 애플을 따라잡기 위해 동료끼리 단점을 보완해주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성과급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면서 경쟁을 유도했다.코오롱도 삼성전자처럼 코오롱의 역량으로 글로벌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영역을 정해 1등 기업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모방해 2등이 되는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모방할 때는 ‘대충’이나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다. 제품의 성능과 품질은 사소한 차이가 결정하기 때문이다.철저하게 모방한 직원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 줘야 한다. 회장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직원이 나와야 그 기업이 발전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코오롱이 듀폰의 기술력을 따라잡겠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까지는 아주 좋았다고 판단된다.◇ 사업가는 정치를 멀리해야 오래 살아 남는다평범한 중견그룹에 불과하던 코오롱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시기는 MB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다. 대통령의 정치적 선배이자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코오롱 출신이고, 이상득 전 의원의 정치적 후원자가 코오롱이었기 때문이다.특히 MB정부가 상하수도 민자사업을 추진하면서 수처리 사업을 미래성장동력으로 추진하고 있던 코오롱이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이 같은 전망은 MB정부가 광우병 사태로 촉발된 촛불집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사라졌다. 그 이후 큰 이슈가 없었던 코오롱이 언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이상득씨가 불법정치자금 혐의로 구속되면서부터다. 이상득씨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사람들도 코오롱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코오롱이 불법정치자금의 근원지처럼 비춰졌다.그리고 2012년 안철수 의원이 대통령후보로 거론되면서 ‘브이소사이어티’라는 재벌 2세들의 친목단체가 주목을 받았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2003년 SK글로벌사태로 구속되면서 탄원서를 내면서 서명을 한 회원들의 명단이 밝혀졌는데, 안철수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벤처기업 활성화에 기여하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던 브이소사이어티에도 이웅열 회장이 포함되어 있었다.한국 재벌사에서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현재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재벌기업들 대부분이 해방 이후 식산재산의 불하나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에서 정치적 특혜를 받아 성장했기 때문이다.정권교체의 고비마다 정치적 결단을 잘해 생명을 연장해 온 대기업도 있고, 정권과 맞서다 공중분해가 된 대기업도 많다. 특정 정권과 밀착해 성장한 기업은 다음 정권에서 탄압을 받으면서 사세가 위축되기도 한다. 이제 정치권과 결탁해서 기업이 장수하기란 쉽지 않다. 국경이 무너지고, 관세가 사라지면서 기업들은 글로벌 무한경쟁에 직면해 있다. 특정 국가의 정치권이 특혜를 베푼다고 본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이 살아남기는 어렵다.지난 봄 STX그룹이 유동성위기로 어려움을 겪자 중국 정부차원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은 없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이 STX가 대규모 투자한 다련시의 서기로 근무했기 때문에 친분이 있다는 것이 이유다. 박근혜정부가 전임 MB정부의 실정을 파헤치고 있어 MB정부로부터 유∙무형의 특혜를 받았을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코오롱이 당분간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인은 가급적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관료에 가깝게 지내면 당장 도움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업이 지속가능성장을 유지하려면 기술개발에 전념해야 한다. 코오롱과 이웅열 회장도 정치에 기웃거리지 말고 본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좋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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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과 같이 한국 섬유산업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코오롱그룹(이하 코오롱)은 창업주 이원만 회장과 아들 이동찬 회장이 공동 창업한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공기업을 제외하고 2012년 말 기준으로 재계서열 32위인 코오롱은 1996년부터 이동찬 회장의 장남인 이웅열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룹규모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높은 편이지만 3세 경영자인 이웅열 회장이 맡은 이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1998년 IMF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주력 사업은 부진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진하고 있는 태양열발전, LED조명, 수처리 사업 등은 진척이 더디다. ◇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수입하고 생산해 의복혁명 주도1953년 한국에 최초로 나일론을 공급한 이원만 회장은 한국 동포들에게 값싸고 질긴 의복을 제공하자는 일념으로 회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사업의 기반을 구축한 후 한국 동포들에게도 혜택을 제공하고자 한국에 나일론 공장을 설립했다.나일론은 1939년 미국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처음 소개된 합성섬유이다. 천연섬유에만 의존하면서 만성적인 부족현상에 시달리던 의복소재 문제를 해결해 준 ‘기적의 섬유’로 불린다. 2차 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에서 1950년대 초 나일론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이원만 회장은1951년 삼경물산㈜를 설립해 국내에 독점공급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6∙25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일론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나일론을 수입판매만 할 경우 일본 업체들의 배만 불린다고 판단한 이원만 회장은 국내에 생산공장 건립을 추진했다. 1964년 한국나이론 공장의 원사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면서 한국의 섬유역사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시대흐름을 잘 파악했던 이원만 회장은 정작 기업경영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다. 1950년대 나일론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1960년 4∙19학생의거 이후 혼란한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잘 넘겼다.이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업과 산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울 구로와 경북 구미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도록 조언했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원만 회장은 정치인으로 나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기업인으로 합성섬유산업에 끼친 영향보다는 남긴 흔적은 적다. 이런 점에서 정치인보다는 기업인으로 외길을 걸었다면 코오롱이 섬유업으로 출발한 SK그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어찌되었건 그는 창업 1세대 경영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업보국’을 자세를 견지하면서 기업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는 초심은 잃지 않았다. 코오롱이 원사와 패션 등 섬유산업의 외길을 걷게 된 것도 창업자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1.5세인 이동찬 명예회장은 국내 마라톤진흥을 위해 노력창업자 이원만 회장이 한국 섬유공업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라면 아들인 이동찬 회장은 이를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다. 이원만 회장이 기업경영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뒀기 때문에, 국내사업은 초기부터 이원만 회장의 동생 이원천 회장과 이동찬 회장이 주도했다.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 회장과 아들 조석래 회장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조홍제 회장이 청춘을 다 바친 삼성그룹과의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효성그룹을 창업할 때 아들 조석래 회장의 조력이 컸다. 이동찬 회장과 조석래 회장을 2세 경영인이라기보다는 1.5세 경영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코오롱은 1964년부터 한국나이론 공장에서 원사생산을 시작했지만, 그룹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1977년이다. 이 때 한국나일론과 한국포리에스텔을 합병해 ㈜코오롱을 설립했으며, 이동찬 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섰다.이전까지는 1957년 코오롱에 입사했던 이원만 회장의 동생인 이원천 코오롱TNS회장이 코오롱의 대표역할을 수행했었다. 당시 이원천 회장은 형인 이원만 회장의 결정에 반발해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원진레이온은 비스코스인견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는데, 1980년대 노동자들이 안전 장비 없이 작업을 함으로써 인체에 치명적인 물질인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어 다수가 사망한 기업이다. 이동찬 회장은 코오롱의 대표가 된 이후 섬유와 무역에 치우쳐 있던 사업구조를 건설, 화학, 전자소재, 이동통신 등으로 확대했다.이동찬 회장이 확장한 사업들은 현재 뚜렷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건설사업은 코오롱건설에서 코오롱글로벌로 이관되었지만 무리한 PF투자로 그룹 부실의 뇌관이 되고 있다.1994년 포크코와 공동 대주주로 이동통신산업으로 시작했지만, 신세기통신의 경영에 대한 이견으로 1999년 SK텔레콤에게 대주주를 넘겼다. 당시 머리가 두 개라서 기업경영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동찬 회장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라는 말을 좋아해 마라톤을 좋아한다고 한다. 승리를 위해 일정한 페이스로 힘차게 달려가는 마라톤이 단숨에 빨리가 아니라 정돌 쉼 없이 멀리 달리는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1977년 코오롱의 경영권을 넘겨받기 이전까지 35년 동안 삼촌인 이원천 회장 밑에서 묵묵히 참고 견디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현실에 접목시키기 위해 마라톤 진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1981년 이동찬 회장은 마라톤의 발전을 위해 2시간 10분내 1억 원, 15분 이내 5천 만원이라는 거금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987년에는 코오롱 마라톤팀이 발족시켰다.그의 꾸준한 지원덕분에 1992년 코오롱마라톤 팀의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1936년 일제 강점기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후 처음으로 전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코오롱이라는 그룹이 마라톤과 연상되는 이유가 이동찬 회장의 인생철학 때문이었다. 코오롱이 이동찬 회장의 경영기간 동안 사업다각화에 성공하고, 마라톤 중흥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지만 사업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1996년 이동찬 회장은 20 여년 간 경영하던 코오롱의 경영권을 건강과 관계없이 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넘겼다. 다른 그룹의 회장들이 죽을 때까지 경영권을 고집하다가 사후에야 경영을 넘기던 관행과는 차이가 많다.이동찬 회장이 퇴임한 이후 코오롱의 마라톤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어 한국 마라톤도 침체기에 접어든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3세 경영인인 이웅열 회장은 취임 이후 내우외환에 시달려1996년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물려 받은 이웅열 회장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회장으로 취임하던 당시 나이가 만 40세로 대기업을 경영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다른 그룹의 회장들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기업경영에 전념했지만 실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1997년 IMF외환위기가 터졌고, 2000년을 전후해 중국기업들이 부상하면서 실적악화로 국내 섬유업체들이 도산이 이어졌다. 당시 많은 섬유업체들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추진했던 휘장사업권에 코오롱TNS가 연루되었다. 2001년 코오롱TNS가 휘장사업권을 넘겨 받기 위해 정∙관계에 불법 로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코오롱TNS는 사업부진으로 부도 처리되었다.당시 코오롱TNS는 104개 하청업체로부터 174억 원 상당의 휘장상품을 납품 받은 후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관련 혐의로 이동보 코오롱TNS회장과 경영진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동보는 이동찬 회장의 동생이지만 코오롱TNS는 코오롱에서 계열분리된 기업이다. 2004년에는 코오롱캐피탈의 473억 원 규모의 횡령사건이 터졌다. 최근에도 전직 대통령의 형의 정치자금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글로벌 기업인 듀폰과 특허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1심에서 패소했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재판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MB정권이 추진했던 4대강 사업의 수 처리 설비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로비를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으며, MB정부가 추진하다가 전국민의 반대로 접었던 상하수도 민자사업도 코오롱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MB정부의 최고 실세였던 이상득 의원이 코오롱사장 출신이기 때문에 MB정권과 밀착해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MB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해 조사를 강화하고 있으며, 건설공사뿐만 아니라 수질개선사업에 관련된 수 처리 회사들도 담합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코오롱글로벌, 코오롱워터텍 등 관계사들도 담합, 불법로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웅열 회장은 본인 스스로 21세기 비전크리에이터로 지칭하고 직함도 CVC(Chief Vision Creator)로 부른다. CVC는 궁극적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코오롱을 라이프스타일을 혁신시키는 LifeStyle Innovator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코오롱은 주력기업의 실적악화, 신성장동력의 부재, 정치사건의 연루 등으로 내우외환에 빠졌다. 취임 당시 불혹(不惑)에 불과했지만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서 이제 이순(耳順)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웅열 회장이 하늘의 뜻을 알고, 세상의 흐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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