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36. 중국과 일본의 민족의식 발전... 중화민국 건립으로 반만종족주의 주창
일본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와 우경화...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도 천황제 존속 추진
민진규 대기자
2026-10-12 오후 4:37:33
한반도는 극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대륙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해양으로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4대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다.

한반도는 고대부터 대륙으로부터 문명을 받아들여 해양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틈바구니 속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한중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황허(黃河) 문명의 발상지로 동아시아 패권을 쥐고 있으며 일본은 근대 이후 아시아의 패자로 급부상했다. 한국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중간에 위치해 양 진영의 특성을 골고루 수용했다.

근대 이후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을 감내하며 성장한 동아시아 3국의 민족의식을 살펴보자.


▲ 1912년 발행된 중화민국 원년 달력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 중국의 민족주의 태동과 공산주의 정체성 확립... 중화민국 건립으로 반만민족주의 주창

중국은 19세기 말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며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으며 족류(族類)는 동족, 무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에는 한족 중심의 만주족 타도, 다민족으로 인한 동화 문제 등에 활용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한 이후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자리매김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56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통합하기 위해 내린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립한 신하이혁명(辛亥革命) 시기에는 반만(反滿) 종족주의가 성행했다. 만주족은 소수이고 한족이 주류인 사회였다. 중화민국은 청의 도읍지였던 베이징(北京)을 버리고 대륙의 남쪽에 있는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했다.

1919년 5월 4일 시작된 학생 시위는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으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가 두드러졌다. 근대 중국의 국부로 칭송받는 쑨원(孫文)은 1919년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를 주창했다.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라고 부르며 유교의 민본주의에 서양의 정치사상을 접목한 개념이다. 쑨원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 개화파의 사상을 많이 수용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한 이후 제1차 및 제2차 국공내전을 치루면서 농민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공산당원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으로 구성됐으며 지주계급과 대립하는 방식의 계급투쟁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농민, 민족주의, 공산주의를 잘 융합한 혁명가라고 평가받는다.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공산혁명의 주체세력으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은 1950년대 중·후반 소련과 사회주의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은 이유 중 하나다.  

1949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인 신중국이 건국되고 나자 마오쩌둥은 계급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특히 농업과 상공업의 집단화를 토대로 한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실패하며 공산당 내부가 분열되자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정책 실패를 반대파에 전가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78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도입했다. 중국 내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의 분열을 통합하고 사회주의를 애국주의와 일치시켜 체제에 대한 신념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중화 문화의 팽창을 통한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도 강했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주요 사례는 1994년 애국주의 교육 법제화, 1999년 서부 한화(漢化)정책, 2002년 이후 동북공정(東北工程) 등이다.

애국주의 교육은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 붕괴로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도입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100권의 책, 100편의 영화, 100곡의 가요 등을 가르친다.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며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의 주요 유적지를 방문하도록 요구한다. 중국의 역사와 공산당의 기본 노선 등 8개 영역이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됐다.

서부 한화정책은 신장위구르(新疆维吾尔自治区), 티벳(西藏·시창) 등 서부 지역에 한족의 이주를 촉진하고 한어(漢語) 보급을 통해 변강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추진한다. 신중국 수립 이후부터 이어져 온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용인하던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신장위구르는 지하자원의 개발, 중앙아시아와 교역로 확보 등의 측면에서 요충지에 속한다. 티벳은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대비하고 티벳독립 운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티벳은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1959년 인도에 망명정부를 설립해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지역이다. 달라이 마라는 유창한 영어와 수준 높은 강연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의 지지를 획득했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 '동북 변방의 역사와 현재 상황 계열의 연구사업'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 한민족이 수립한 국가인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고 이들 왕조에 대한 역사적 주권을 강조하는 정책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현재 중국의 영토인 만주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점유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던 광개토대왕비나 장수왕릉 등에 대한 관리·감독도 강화했다.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은 역사를 넘어 한복이나 김치 등 문화영역까지 확장 중이다.

문화는 정부 차원보다 대중 민족주의를 앞세운 민간이 왜곡을 주도하고 있다. 편협한 세계관과 근거 없는 주장은 중국인이 세계에서 고립돼 가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일본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와 우경화...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도 천황제 존속 추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국민(國民)’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국가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역사와 학문을 연구하며 근대국가의 기초로 민족을 활용했다. 족민(族民)은 ‘종족을 같이 하는 일정한 민중’, 국민은 ‘같은 국토 안에 거주하는 일정한 민중’으로 구분했다.

야마토민족(大和民族)은 원주민인 조몬인 (縄文人)과 이주민인 야요이인(弥生人)이 혼합된 민족으로 당시 일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했지만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와 오키나와(沖縄)를 병합한 이후 새로운 민족 개념을 창안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홋카이도는 아이누(ヤウンクル족, 오카나와는 류큐인(琉球人)으로 불린다. 일본 정부는 2008년 유엔(UN)의 권고에 따라 아이누족을 소수 민족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류큐인은 아직 야마토 민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본토인이 대거 이주하며 통혼이 활발해진 것도 이유로 꼽는다.

20세기 일본의 대표 역사학자이자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지(津田左右吉)는 1913년 ‘(일본서기) 신대사(神代史)의 새로운 연구’에서 일본 민족은 단일민족이며 한반도에서 이주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일본의 국인은 인종이 같고 풍속 습관이 같으며 또한 열력(曆)도 같은 동일 민족이다’고 주장했다. 또한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부정하며 신화는 허구이며 역사적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통해 민족의 개념을 정립했다. 민족주의가 혈통주의, 인종주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국가주의를 사용했다.

특히 일본이 야마토 민족의 단일 문화를 지닌 국가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의 원주민을 포용할 수 없었다. 이후 이들의 결합을 추진하고 전체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가단결의 목적으로 국가주의를 발전시켰다.

근대 민족주의는 히로히토(迪宮裕仁) 천황이 지배하던 쇼와(昭和) 시대에 극단적인 국수주의, 천황 파시즘으로 변질됐다. 1928년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시작했다. 특히 태평양전쟁은 히로히토가 어전회의에서 각료와 논의한 후 결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이후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도입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이유로 좌파에 반감을 가졌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도입했다. 한국전쟁(1950~1953),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민족주의에 대한 법적, 사회적 제한이 해제됐다.

1990년대 보수 정치인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우경화가 본격화되며 현대 내셔널리즘이 대두됐다. 일장기, 욱일기 등 군국주의 잔재가 거리낌 없이 사용됐으며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하는 정치인이 늘어났다.

욱일기는 6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부터 사용됐지만 1870년 일본제국 육군의 군기로 채택됐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전사자의 위패를 모시며 신격화하고 있는 군국주의 상징이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기획·특집 분류 내의 이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