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0. 미국 재미동포의 역사와 고민... 남성보다 여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
1970년대 이후 사업·학업 목적으로 정착하는 이민자 증가... 교회를 구심점으로 교육 및 정체성 확립
미국은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영국 식민지 당시부터 이민자를 적극 수용했다. 인디언으로부터 구입하거나 빼앗은 땅을 저렴하게 제공하며 이민자를 유혹했다.
유럽의 중산층이나 서민에게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이룰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다. 신분제에 대한 제약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개척지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활용해 농장을 운영했지만 노예가 해방되며 저렴한 노동자의 공급지로 아시아를 낙점했다. 전 근대적인 왕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 인도, 일본,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정 민족의 비율이 증가하면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하려는 전략도 한국인에게도 이민의 기회를 제공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일하기 위해 떠난 이후 21세기 들어서도 경제, 교육 등의 이유로 이민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 아시아 이민 노동자로 건설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이미지 [출처= iNIS]
◇ 미국 이민사는 4단계로 구분 가능... 1970년대 이후 사업·학업 목적으로 정착하는 이민자 증가
미국은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후 조선에 접근했다. 1866년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는 통상을 거절당했음에도 펑양 대동강에 칩입했다. 평양 관민이 합심해 선원을 전부 죽이고 배를 불태웠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1882년 미국과 조선은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미국은 조선의 이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이나 필리핀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협정(Taft-Katsura Agreement)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리를 용인했다. 미국으로 한인의 이주 역사는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902년부터 1924년까지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건너갔다. 1902년 12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이민선은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따듯한 날씨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춘 하와이이지만 노동자에게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폭염 아래에서 매일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농사 경험이 풍부한 이민자였지만 탈수 증세로 쓰러지는 사람도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문화적 차별로 사회적 고립도 극복해야 했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한인학교를 설립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이민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점차 성장했다.
2단계는 1925년부터 1965년까지 ’동양인 배척법‘이 시행되며 외국인의 미국 이민의 암흑기에 해당된다. 미국 정부는 1924년 이민법을 개정하며 인종, 국적에 따라 이민자 비율을 제한했다.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한국인 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동양인에 대한 배척은 1882년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t), 1907년 이민법(The Immigration Act of 1907) 등으로 구체화됐다.
1950년대 흑인이 차별을 금지하라며 저항하자 1964년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of 1964)이 제정됐다. 1965년 이민법이 재재되며 이민이 다시 증가하게 됐다.
3단계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이민이 증가한 시기다. 1970년 1년 동안 1만1395명이 미국에 입국해 연간 기준으로 처음 1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에는 1980년도까지 이민자가 꾸준하게 증가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의 경제 상황이 열악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사람이 많았다. 전문직보다는 비숙련 노동직과 의료전문직 인력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4단계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로 초기에는 이민자가 감소하다가 1990년대부터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0년대 미국 이민자는 연간 3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활발했다. 1987년 3만5849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줄어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에서 제조업의 호황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풍부해지며 이민에 대한 열기가 식었다. 1990년대 한국보다 급여가 많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보다 유학과 투자 목적의 이민자가 늘어났다.
미국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정착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이들은 대기업, 연구소, 공무원,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직에 진출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교회를 구심점으로 교육 및 정체성 확립... 남성보다 여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간 한국인은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가 한인 캠프(Korean Camp)라고 불리며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은 ’백성이 무지해서 나라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한인의 교육과 정체성 유지를 담당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주일에 교회에 모여 동포를 만나며 공동체 의식을 가다듬었다.
교회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일자리를 알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민 1세대가 언어에 능숙하지 못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얻은 교훈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도 공동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와 연결이 필수적이었다.
교회는 1세대 이민자의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2세대가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한글 교재를 직접 만들어서 학생을 가르쳤다.
미국의 재미동포도 일본의 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2~3세로 넘어오며 정체성을 잃고 있다. 어릴 적에 교회에서 한글을 배웠더라도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점차 언어를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인 2세 가정 중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비율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재미동포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있다. 교민사회의 소식을 전달하는 한국어 언론도 구독자의 감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전으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인끼리 결혼을 한 1세대와 달리 2~3세대는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10년 센서스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인의 타민족과 결혼율은 40%로 드러났다. 타(他) 아시안계와 8%, 비(非) 아시안계와 32% 등으로 조사됐다.
2020년 기준 2세 한인 여성 중 결혼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백인과의 결혼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일본인, 중국인 등 아시안계와 결혼을 선택하는 편이다.
유럽의 중산층이나 서민에게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이룰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다. 신분제에 대한 제약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개척지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활용해 농장을 운영했지만 노예가 해방되며 저렴한 노동자의 공급지로 아시아를 낙점했다. 전 근대적인 왕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 인도, 일본,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정 민족의 비율이 증가하면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하려는 전략도 한국인에게도 이민의 기회를 제공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일하기 위해 떠난 이후 21세기 들어서도 경제, 교육 등의 이유로 이민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 아시아 이민 노동자로 건설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이미지 [출처= iNIS]
◇ 미국 이민사는 4단계로 구분 가능... 1970년대 이후 사업·학업 목적으로 정착하는 이민자 증가
미국은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후 조선에 접근했다. 1866년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는 통상을 거절당했음에도 펑양 대동강에 칩입했다. 평양 관민이 합심해 선원을 전부 죽이고 배를 불태웠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1882년 미국과 조선은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미국은 조선의 이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이나 필리핀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협정(Taft-Katsura Agreement)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리를 용인했다. 미국으로 한인의 이주 역사는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902년부터 1924년까지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건너갔다. 1902년 12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이민선은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따듯한 날씨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춘 하와이이지만 노동자에게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폭염 아래에서 매일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농사 경험이 풍부한 이민자였지만 탈수 증세로 쓰러지는 사람도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문화적 차별로 사회적 고립도 극복해야 했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한인학교를 설립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이민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점차 성장했다.
2단계는 1925년부터 1965년까지 ’동양인 배척법‘이 시행되며 외국인의 미국 이민의 암흑기에 해당된다. 미국 정부는 1924년 이민법을 개정하며 인종, 국적에 따라 이민자 비율을 제한했다.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한국인 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동양인에 대한 배척은 1882년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t), 1907년 이민법(The Immigration Act of 1907) 등으로 구체화됐다.
1950년대 흑인이 차별을 금지하라며 저항하자 1964년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of 1964)이 제정됐다. 1965년 이민법이 재재되며 이민이 다시 증가하게 됐다.
3단계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이민이 증가한 시기다. 1970년 1년 동안 1만1395명이 미국에 입국해 연간 기준으로 처음 1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에는 1980년도까지 이민자가 꾸준하게 증가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의 경제 상황이 열악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사람이 많았다. 전문직보다는 비숙련 노동직과 의료전문직 인력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4단계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로 초기에는 이민자가 감소하다가 1990년대부터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0년대 미국 이민자는 연간 3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활발했다. 1987년 3만5849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줄어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에서 제조업의 호황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풍부해지며 이민에 대한 열기가 식었다. 1990년대 한국보다 급여가 많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보다 유학과 투자 목적의 이민자가 늘어났다.
미국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정착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이들은 대기업, 연구소, 공무원,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직에 진출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교회를 구심점으로 교육 및 정체성 확립... 남성보다 여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아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간 한국인은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가 한인 캠프(Korean Camp)라고 불리며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은 ’백성이 무지해서 나라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한인의 교육과 정체성 유지를 담당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주일에 교회에 모여 동포를 만나며 공동체 의식을 가다듬었다.
교회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일자리를 알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민 1세대가 언어에 능숙하지 못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얻은 교훈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도 공동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와 연결이 필수적이었다.
교회는 1세대 이민자의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2세대가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한글 교재를 직접 만들어서 학생을 가르쳤다.
미국의 재미동포도 일본의 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2~3세로 넘어오며 정체성을 잃고 있다. 어릴 적에 교회에서 한글을 배웠더라도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점차 언어를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인 2세 가정 중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비율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재미동포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있다. 교민사회의 소식을 전달하는 한국어 언론도 구독자의 감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전으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인끼리 결혼을 한 1세대와 달리 2~3세대는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10년 센서스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인의 타민족과 결혼율은 40%로 드러났다. 타(他) 아시안계와 8%, 비(非) 아시안계와 32% 등으로 조사됐다.
2020년 기준 2세 한인 여성 중 결혼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백인과의 결혼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일본인, 중국인 등 아시안계와 결혼을 선택하는 편이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