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9. 서독과 동독의 이산가족 현황과 이슈 ... 인도주의 측면에서 이주가 필요한 사람은 허용
서독과 동독은 1964년부터 이산가족 상호방문 허용... 서독 정부는 방문자에게 환영금 명목으로 지원
유럽연합(EU)의 최강대국인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국에 졌지만 강제 분할로 이어지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규제하고자 했다.
1945년 서독과 동독이 분리됐지만 양국은 친인척을 방문하거나 이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서독 국민의 40%, 동독 주민의 60% 이상이 상대국에 친인척이나 친구와 연락했다.
하지만 진정한 이산가족 결합은 1989년 동독이 무너지며 완성됐다. 동독은 다른 국가에 비해 이산가족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했다. 서독과 동독의 이산가족 이슈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장면 [출처=위키피디아]
◇ 서독과 동독은 1964년부터 이산가족 상호방문 허용... 서독 정부는 방문자에게 환영금 명목으로 지원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자유민주주의인 서독과 공산주의인 동독으로 갈라졌다. 서독과 동독은 강대국의 의해 강제로 분할됐지만 상호방문을 허용하는 등 교류를 끊지 않았다. 동독은 1952년 출입 금지 구역을 정해 서독으로 이동을 제한했다.
1961년 수도인 베를린 한가운데 장벽이 설치되면서 이산가족의 왕래가 완전히 끊어졌다. 일부 동독 국민은 가족은 둔 채 혼자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왔는데 장벽으로 자연스럽게 이산가족으로 전락했다. 서독은 전후 복구사업에 전력하면서 동독에 비해 일자리가 풍부했다.
동독 각료이사회는 1964년 11월 연금수령자는 4주간 서독을 방문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공산 체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치 잔당을 처단하며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긍지가 충만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지만 이산가족의 왕래로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독도 동유럽 국가 중에서는 생활 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서독 정부는 방문자에게 환영금으로 100마르크씩 지급했다. 1964년에만 1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했다. 직접 방문 외에서 편지도 허용했다.
1968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1억500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1억1500만 통의 편지가 주인을 찾았다. 동독 정부는 편지 한 통에 0.3마르크를 받았는데 당시 한국 돈으로 150원 정도였다. 연간 3000만 마르크를 편지 배달료도 챙겼으며 조금씩 올리다가 1977년 이후에는 8500만 마르크 수준에 머물렀다.
1972년 양국은 교통조약(Verkehrsabkommen)을 체결했다. 조약 당사국의 영토 내 혹은 영토를 경유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인 국제 관례에 맞게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조약으로 연간 1000만 명의 국민이 서로 왕래했다.
1972년 10월 17일 조약이 발효되며 편지보다는 전화로 소통하는 방식이 선호됐다. 1975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연 1000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400만 통의 전화 통화가 성사됐다.
1975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773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137만 명이 국경을 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1년 전인 1988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667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675만 명이 서로 가족을 방문했다. 당시 동독의 인구가 1700만 명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민에 의해 장벽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통일됐다. 1989년 1월부터 10월 말까지 5000만 통의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서독과 동독은 상호가 인적교류를 지속적으로 허용해 이질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동독은 유연한 이산가족 상봉 정책을 펼쳐... 인도주의 측면에서 이주가 필요한 사람은 허용
동독 정부는 이산가족의 상봉으로 체제가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해 유연하게 대처했다. 사회주의는 일자리는 부족해도 사회복지제도가 완벽했을 뿐 아니라 양극화가 없어 상대적 박탈감이 낮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기조는 동독이 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서독 정부는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대가로 동독 정부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독도 부자인 서독 국민이 동독을 방문해 용돈을 주거나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서독을 방문하려는 사람을 선정할 때 연금수령자에게 우선 순위를 제공했다. 서독 국민이 동독에 살고 있는 ‘가까운 친척’뿐 아니라 이웃 등과 같이 ‘잘 아는 사람’을 방문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동독 주민 중 질병이나 기타 이유로 서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규제의 대상은 아니었다. 인도주의 측면에서 이주가 필요한 사람까지 차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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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독과 동독이 분리됐지만 양국은 친인척을 방문하거나 이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서독 국민의 40%, 동독 주민의 60% 이상이 상대국에 친인척이나 친구와 연락했다.
하지만 진정한 이산가족 결합은 1989년 동독이 무너지며 완성됐다. 동독은 다른 국가에 비해 이산가족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했다. 서독과 동독의 이산가족 이슈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장면 [출처=위키피디아]
◇ 서독과 동독은 1964년부터 이산가족 상호방문 허용... 서독 정부는 방문자에게 환영금 명목으로 지원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자유민주주의인 서독과 공산주의인 동독으로 갈라졌다. 서독과 동독은 강대국의 의해 강제로 분할됐지만 상호방문을 허용하는 등 교류를 끊지 않았다. 동독은 1952년 출입 금지 구역을 정해 서독으로 이동을 제한했다.
1961년 수도인 베를린 한가운데 장벽이 설치되면서 이산가족의 왕래가 완전히 끊어졌다. 일부 동독 국민은 가족은 둔 채 혼자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왔는데 장벽으로 자연스럽게 이산가족으로 전락했다. 서독은 전후 복구사업에 전력하면서 동독에 비해 일자리가 풍부했다.
동독 각료이사회는 1964년 11월 연금수령자는 4주간 서독을 방문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공산 체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치 잔당을 처단하며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긍지가 충만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지만 이산가족의 왕래로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독도 동유럽 국가 중에서는 생활 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서독 정부는 방문자에게 환영금으로 100마르크씩 지급했다. 1964년에만 1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했다. 직접 방문 외에서 편지도 허용했다.
1968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1억500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1억1500만 통의 편지가 주인을 찾았다. 동독 정부는 편지 한 통에 0.3마르크를 받았는데 당시 한국 돈으로 150원 정도였다. 연간 3000만 마르크를 편지 배달료도 챙겼으며 조금씩 올리다가 1977년 이후에는 8500만 마르크 수준에 머물렀다.
1972년 양국은 교통조약(Verkehrsabkommen)을 체결했다. 조약 당사국의 영토 내 혹은 영토를 경유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인 국제 관례에 맞게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조약으로 연간 1000만 명의 국민이 서로 왕래했다.
1972년 10월 17일 조약이 발효되며 편지보다는 전화로 소통하는 방식이 선호됐다. 1975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연 1000만 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400만 통의 전화 통화가 성사됐다.
1975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773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137만 명이 국경을 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1년 전인 1988년 기준 서독에서 동독으로 667만 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675만 명이 서로 가족을 방문했다. 당시 동독의 인구가 1700만 명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민에 의해 장벽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통일됐다. 1989년 1월부터 10월 말까지 5000만 통의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서독과 동독은 상호가 인적교류를 지속적으로 허용해 이질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동독은 유연한 이산가족 상봉 정책을 펼쳐... 인도주의 측면에서 이주가 필요한 사람은 허용
동독 정부는 이산가족의 상봉으로 체제가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해 유연하게 대처했다. 사회주의는 일자리는 부족해도 사회복지제도가 완벽했을 뿐 아니라 양극화가 없어 상대적 박탈감이 낮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기조는 동독이 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서독 정부는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대가로 동독 정부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독도 부자인 서독 국민이 동독을 방문해 용돈을 주거나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서독을 방문하려는 사람을 선정할 때 연금수령자에게 우선 순위를 제공했다. 서독 국민이 동독에 살고 있는 ‘가까운 친척’뿐 아니라 이웃 등과 같이 ‘잘 아는 사람’을 방문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동독 주민 중 질병이나 기타 이유로 서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규제의 대상은 아니었다. 인도주의 측면에서 이주가 필요한 사람까지 차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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