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2.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한계와 극복 노력...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며 귀국 포기하고 잔류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며 체류국 국민과 갈등 최소화 추구... 중국 지도부의 정책 변화와 대중화권 추진 노력
중국 정부는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해외에 거주 중인 중국인을 적극 활용했다. 고대부터 중국인은 왕조의 흥망이나 정치 이념보다 장사를 통한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며 홍콩이나 대만으로 이주한 남부 지역 출신은 중국 본토의 정책 변화에 적극 호응했다. 홍콩에 인접한 선전(深川)을 개방하며 노하우를 축적한 후 광저우, 항저우, 상하이, 텐진 등으로 확대했다.
중국 본토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둔 기업은 홍콩에 거점을 둔 청쿵그룹(長江實業)이 대표적이다. 창업자인 리카싱(李嘉誠)은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시에도 폭락한 홍콩의 부동산을 대거 매입해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동양 역사에서 최고 성현이라 불리는 공자(孔子)가 도덕정치를 주문하고 인(仁)과 예(禮)을 중시하라고 가르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56개 민족이 중원을 두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얻은 교훈은 이(利)를 먼저 추구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하는 혼란기에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이 적지 않았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주류 계층으로 부상한 화교의 한계와 극복 노력에 대해 살펴보자.
▲ 중국 남부 선전 시내 전경 [출처= iNIS]
◇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화교의 역사...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며 귀국 포기하고 잔류
11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화교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주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했다. 근면 성실하고 장사에 재능이 많았을 뿐 아니라 현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 정세에 밝았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2026년 현재 동남아시아 화교가 가장 번성한 국가는 싱가포르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할 당시에 화교가 중심이 돼 국가를 건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약 80%가 화교인 국가로 27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말레이반도 끝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1819년 영국령으로 정해진 이후 20세기 초까지 중국인의 비율이 점차 늘어났다. 농사조차 짓기 어려울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중개 무역항으로서는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화교와 토착민인 말레이인, 인도인이 주류 민족이다.
1965년 독립 국가를 선포한 싱가포르는 중국인, 말레인, 인도인의 고유문화를 인정하는 다문화 정책을 펼쳤다. 싱가포르가 중국인 중심의 국가로 부상하면서 이웃 국가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재이주도 활발해졌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다음으로 전체 인구 중 화교의 비율이 높은 국가다. 말레이시아의 중국인은 남부의 광둥성(廣東省)과 푸젠성(福建省)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말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중국인의 이주가 본격화됐다. 19세기 말 이후 중국에서 태평천국운동, 정치적 불안, 수공업의 몰락, 자연재해, 정부의 이민정책 완화 등으로 말레이시아로 가는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말레이시아에서 주석과 고무 생산이 확대되며 경제가 성장한 것도 중국인에게 매력적인 이민지로 여겨졌다. 영국은 산업화의 필수 자원인 주석(TN)의 개발을 위해 중국인을 이주시켰다. 말레이 원주민이 힘든 광산 노동을 꺼렸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고 말레이시아와 대만이 국교를 단절하며 화교는 귀국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도 화교에게 정식 시민권을 부여했다.
속지주의(屬地主義) 원칙에 따라 현지에서 출생한 비말레이라도 5년 이상 계속 거주하고 간단한 말레이어나 영어 시험을 통과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던 화교는 일정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 거주권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 섬의 전경 [출처= iNIS]
◇ 태국과 필리핀의 화교 역사...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며 갈등 최소화 추구
태국(Kingdom of Thailand)은 남송 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며 중국인이 현지에 진출했다. 남송이 원에 의해 멸망하자 귀족 중 일부가 태국으로 이주한 사례도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원은 동남아시아 교역을 통해 부를 형성한 남송의 정책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역을 추진했다.
태국 아유타야왕조(Ayutthaya Kingdom)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중국인을 명(明)나라에 조공 사신으로 파견했다. 해외 무역을 하면서 관료직까지 겸임하던 이들을 ’관료 화상‘이라고 불렀다. 15세기 명 정허의 대원정을 계기로 동남아시아 무역 중개지인 태국으로 진출하는 화교는 더욱 늘어났다.
태국에 정착한 중국인은 푸젠성 샤먼(厦门) 출신이 많았으며 이들이 상권을 주도했다. 특히 1720년대 푸젠성에 가뭄으로 식량 부족 사태가 심해지며 태국으로 이주가 급증했다.
태국은 19세기부터 자급자족을 하고 남아도는 쌀을 중국으로 적극 수출했다. 저렴한 태국산 쌀을 수입하기 위해 중국 상인의 이주도 늘어났다. 태국의 부유층은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해 사용했다.
필리핀에 화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당(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은 남중국에서 멀지 않았고 대항해 시대에 중동과 유럽으로 가는 해상 무역의 중계지로 부상했다.
마닐라 왕국은 당나라부터 중국 왕실의 허락을 받아 조공무역을 시작했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약재 등을 받아서 말라카해협을 거쳐 중동으로 운송됐다. 당시 마닐라 왕국에는 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이 집단 거주하는 차이나타운(china town)이 생겼다.
156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해 총독부를 세우면서 중국인의 필리핀 이주는 더 늘어났다. 스페인은 문자와 숫자에 밝은 중국인을 보조자로 고용해 중국과 유럽의 무역을 장악하고자 노력했다.
스페인은 중국의 상품을 마닐라로 운송한 후 태평양 항로를 거쳐 멕시코로 보냈다. 멕시코에 도착한 중국 상품은 스페인, 유럽으로 수출됐다.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유럽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했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됐을 뿐 아니라 위험이 더 컸다.
필리핀에 정착한 중국인은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 공업, 석공, 페인트공 등의 기술자가 많았다. 1574년 중국의 해적 리마홍(Limahong)이 스페인의 정착지인 필리핀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해적의 공격을 받자 스페인은 중국인이 배신할 수 있다고 걱정하며 충성심을 의심했다.
스페인은 1586년 중국계 주민을 분리하고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중국인의 반란 계획을 포착한 스페인은 일본인과 토착인 타갈로그 군대와 연합해 중국인 2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숫자가 많은 중국인이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데 위협적이었음에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중국인이 현지 원주민보다 문자 해독률이 높고 상업 거래에 능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의 보조자 역할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은 1603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수만 명의 중국인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지만 이후에도 수 차례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필리핀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스페인 사람보다 5배나 더 많았고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미국과 전쟁에서 패배,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편입 등으로 중국과 교역을 축소했다.
중국인은 필리핀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상업을 주도하며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러 번 반복된 반란과 피난으로 마닐라 뿐 아니라 민다나오섬 등 다수 지역으로 중국인의 거주지가 확대됐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본토의 공산화와 화교의 미래 변화... 중국 지도부의 정책 변화와 대중화권 추진 노력
1949년 중국 본토가 오랜 내전 끝에 공산화되면서 해외 각지에서 거주하던 화교는 귀국보다 거주지에서 정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현지 사회에 동화됐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중화민국은 대만(Taiwan)으로 물러나 국가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중국 본토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모국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가 증가했다. 중국의 공산당도 해외 거주 화교의 투자유치를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영국령인 홍콩(Hong Kong)을 통해 중국 본토와 거래하는 동남아시아 화교가 증가했다.
해외로 이주한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 남부 출신으로 정치보다는 상업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거래에 이익을 남길 수 있는지만 판단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해외 중국인과 협력하는 정책을 선택한 공산당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다. 중국이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며 본토는 다시 화교의 모국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화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국의 정치체제나 인권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풍부한 자원과 거대한 시장을 갖추고 있어 좋은 사업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은 현지에서 토착 세력과 갈등이 빈발하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것도 현지인에게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민족성도 한몫한다. 화교는 자국의 문화를 고수하며 현지인과 혼인을 꺼리는 편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다.
현대에 들어서 화교는 거주국 지배자와 일반 민중 사이에서 중간자 소수자(middleman minority) 역할을 담당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정치에 진출한 화교가 많지 않은 이유다.
반면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정치 선진국으로 이주한 화교는 정치활동에 적극적이다. 동남아시아와 달리 중국인의 비율도 높지 않고 경제 영향력도 크지 않아 현지 주민의 반발이 거세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도 해외 거주 화교의 정치활동에 긍정적이다. 세계의 공장이자 거대 소비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과 교역하고자 하면 꽌시(关系, Guanxi)가 중요해 현지와 네트워크를 가진 화교가 필요하다.
해외 화교는 전 세계에 골고루 거주하는 유대인과 달리 동남아시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한정돼 있다. 다만 중국이 21세기 들어 미국에 이어 제 2위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영향력이 커지는 중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온 역사를 갖고 있으므로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주도 국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스럽게 화교의 지위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배타적인 민족성과 지나친 상업주의 등으로 현지인과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우려스럽다.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를 통해 국수주의(Ultranationalism))를 극복한다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특정 문화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으므로 다른 문화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반면에 국수주의는 자신의 문화가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해 다른 문화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2010년대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격하게 신장되며 대중화권(Great China)을 강조한 극우주의가 발호되고 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자국의 이익에 침해되는 국가를 대상으로 전랑외교(战狼外交)를 펼치며 갈등을 조장한다.
전랑외교는 외교관이 타국을 늑대처럼 공격한다는 의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국가 간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외교관의 자질인데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특히 시진핑(習近平)이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 2013년 이후 이러한 기조가 강화됐다. 단기적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중국 인민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화교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불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며 홍콩이나 대만으로 이주한 남부 지역 출신은 중국 본토의 정책 변화에 적극 호응했다. 홍콩에 인접한 선전(深川)을 개방하며 노하우를 축적한 후 광저우, 항저우, 상하이, 텐진 등으로 확대했다.
중국 본토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둔 기업은 홍콩에 거점을 둔 청쿵그룹(長江實業)이 대표적이다. 창업자인 리카싱(李嘉誠)은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시에도 폭락한 홍콩의 부동산을 대거 매입해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동양 역사에서 최고 성현이라 불리는 공자(孔子)가 도덕정치를 주문하고 인(仁)과 예(禮)을 중시하라고 가르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56개 민족이 중원을 두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얻은 교훈은 이(利)를 먼저 추구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하는 혼란기에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이 적지 않았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주류 계층으로 부상한 화교의 한계와 극복 노력에 대해 살펴보자.
▲ 중국 남부 선전 시내 전경 [출처= iNIS]
◇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화교의 역사...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며 귀국 포기하고 잔류
11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화교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주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했다. 근면 성실하고 장사에 재능이 많았을 뿐 아니라 현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 정세에 밝았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2026년 현재 동남아시아 화교가 가장 번성한 국가는 싱가포르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할 당시에 화교가 중심이 돼 국가를 건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약 80%가 화교인 국가로 27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말레이반도 끝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1819년 영국령으로 정해진 이후 20세기 초까지 중국인의 비율이 점차 늘어났다. 농사조차 짓기 어려울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중개 무역항으로서는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화교와 토착민인 말레이인, 인도인이 주류 민족이다.
1965년 독립 국가를 선포한 싱가포르는 중국인, 말레인, 인도인의 고유문화를 인정하는 다문화 정책을 펼쳤다. 싱가포르가 중국인 중심의 국가로 부상하면서 이웃 국가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재이주도 활발해졌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다음으로 전체 인구 중 화교의 비율이 높은 국가다. 말레이시아의 중국인은 남부의 광둥성(廣東省)과 푸젠성(福建省)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말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중국인의 이주가 본격화됐다. 19세기 말 이후 중국에서 태평천국운동, 정치적 불안, 수공업의 몰락, 자연재해, 정부의 이민정책 완화 등으로 말레이시아로 가는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말레이시아에서 주석과 고무 생산이 확대되며 경제가 성장한 것도 중국인에게 매력적인 이민지로 여겨졌다. 영국은 산업화의 필수 자원인 주석(TN)의 개발을 위해 중국인을 이주시켰다. 말레이 원주민이 힘든 광산 노동을 꺼렸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고 말레이시아와 대만이 국교를 단절하며 화교는 귀국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도 화교에게 정식 시민권을 부여했다.
속지주의(屬地主義) 원칙에 따라 현지에서 출생한 비말레이라도 5년 이상 계속 거주하고 간단한 말레이어나 영어 시험을 통과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던 화교는 일정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 거주권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 섬의 전경 [출처= iNIS]
◇ 태국과 필리핀의 화교 역사...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며 갈등 최소화 추구
태국(Kingdom of Thailand)은 남송 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며 중국인이 현지에 진출했다. 남송이 원에 의해 멸망하자 귀족 중 일부가 태국으로 이주한 사례도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원은 동남아시아 교역을 통해 부를 형성한 남송의 정책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역을 추진했다.
태국 아유타야왕조(Ayutthaya Kingdom)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중국인을 명(明)나라에 조공 사신으로 파견했다. 해외 무역을 하면서 관료직까지 겸임하던 이들을 ’관료 화상‘이라고 불렀다. 15세기 명 정허의 대원정을 계기로 동남아시아 무역 중개지인 태국으로 진출하는 화교는 더욱 늘어났다.
태국에 정착한 중국인은 푸젠성 샤먼(厦门) 출신이 많았으며 이들이 상권을 주도했다. 특히 1720년대 푸젠성에 가뭄으로 식량 부족 사태가 심해지며 태국으로 이주가 급증했다.
태국은 19세기부터 자급자족을 하고 남아도는 쌀을 중국으로 적극 수출했다. 저렴한 태국산 쌀을 수입하기 위해 중국 상인의 이주도 늘어났다. 태국의 부유층은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해 사용했다.
필리핀에 화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당(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은 남중국에서 멀지 않았고 대항해 시대에 중동과 유럽으로 가는 해상 무역의 중계지로 부상했다.
마닐라 왕국은 당나라부터 중국 왕실의 허락을 받아 조공무역을 시작했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약재 등을 받아서 말라카해협을 거쳐 중동으로 운송됐다. 당시 마닐라 왕국에는 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이 집단 거주하는 차이나타운(china town)이 생겼다.
156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해 총독부를 세우면서 중국인의 필리핀 이주는 더 늘어났다. 스페인은 문자와 숫자에 밝은 중국인을 보조자로 고용해 중국과 유럽의 무역을 장악하고자 노력했다.
스페인은 중국의 상품을 마닐라로 운송한 후 태평양 항로를 거쳐 멕시코로 보냈다. 멕시코에 도착한 중국 상품은 스페인, 유럽으로 수출됐다.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유럽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했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됐을 뿐 아니라 위험이 더 컸다.
필리핀에 정착한 중국인은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 공업, 석공, 페인트공 등의 기술자가 많았다. 1574년 중국의 해적 리마홍(Limahong)이 스페인의 정착지인 필리핀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해적의 공격을 받자 스페인은 중국인이 배신할 수 있다고 걱정하며 충성심을 의심했다.
스페인은 1586년 중국계 주민을 분리하고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 중국인의 반란 계획을 포착한 스페인은 일본인과 토착인 타갈로그 군대와 연합해 중국인 2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숫자가 많은 중국인이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데 위협적이었음에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중국인이 현지 원주민보다 문자 해독률이 높고 상업 거래에 능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의 보조자 역할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은 1603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수만 명의 중국인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지만 이후에도 수 차례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필리핀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스페인 사람보다 5배나 더 많았고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미국과 전쟁에서 패배,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편입 등으로 중국과 교역을 축소했다.
중국인은 필리핀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상업을 주도하며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러 번 반복된 반란과 피난으로 마닐라 뿐 아니라 민다나오섬 등 다수 지역으로 중국인의 거주지가 확대됐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본토의 공산화와 화교의 미래 변화... 중국 지도부의 정책 변화와 대중화권 추진 노력
1949년 중국 본토가 오랜 내전 끝에 공산화되면서 해외 각지에서 거주하던 화교는 귀국보다 거주지에서 정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현지 사회에 동화됐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중화민국은 대만(Taiwan)으로 물러나 국가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중국 본토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모국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가 증가했다. 중국의 공산당도 해외 거주 화교의 투자유치를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영국령인 홍콩(Hong Kong)을 통해 중국 본토와 거래하는 동남아시아 화교가 증가했다.
해외로 이주한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 남부 출신으로 정치보다는 상업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거래에 이익을 남길 수 있는지만 판단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해외 중국인과 협력하는 정책을 선택한 공산당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다. 중국이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며 본토는 다시 화교의 모국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화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국의 정치체제나 인권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풍부한 자원과 거대한 시장을 갖추고 있어 좋은 사업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은 현지에서 토착 세력과 갈등이 빈발하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것도 현지인에게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민족성도 한몫한다. 화교는 자국의 문화를 고수하며 현지인과 혼인을 꺼리는 편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다.
현대에 들어서 화교는 거주국 지배자와 일반 민중 사이에서 중간자 소수자(middleman minority) 역할을 담당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정치에 진출한 화교가 많지 않은 이유다.
반면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정치 선진국으로 이주한 화교는 정치활동에 적극적이다. 동남아시아와 달리 중국인의 비율도 높지 않고 경제 영향력도 크지 않아 현지 주민의 반발이 거세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도 해외 거주 화교의 정치활동에 긍정적이다. 세계의 공장이자 거대 소비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과 교역하고자 하면 꽌시(关系, Guanxi)가 중요해 현지와 네트워크를 가진 화교가 필요하다.
해외 화교는 전 세계에 골고루 거주하는 유대인과 달리 동남아시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한정돼 있다. 다만 중국이 21세기 들어 미국에 이어 제 2위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영향력이 커지는 중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온 역사를 갖고 있으므로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주도 국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스럽게 화교의 지위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배타적인 민족성과 지나친 상업주의 등으로 현지인과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우려스럽다.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를 통해 국수주의(Ultranationalism))를 극복한다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특정 문화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으므로 다른 문화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반면에 국수주의는 자신의 문화가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해 다른 문화를 배척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2010년대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격하게 신장되며 대중화권(Great China)을 강조한 극우주의가 발호되고 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자국의 이익에 침해되는 국가를 대상으로 전랑외교(战狼外交)를 펼치며 갈등을 조장한다.
전랑외교는 외교관이 타국을 늑대처럼 공격한다는 의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국가 간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외교관의 자질인데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특히 시진핑(習近平)이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 2013년 이후 이러한 기조가 강화됐다. 단기적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중국 인민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화교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불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