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1. 독립국가연합(CIS) 고려인의 역사와 고민... 3~5세대로 넘어오며 현지와 동화되어 정체성 사라져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흩어져... 소련 붕괴후 연해주 귀환했지만 적응에 한계
제정러시아는 17세기 근대화에 성공한 이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를 넘어서 캄차카반도, 오호츠크해 등 태평양까지 영토를 넓혔다. 1860년 중국의 청(靑)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를 확보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연해주 지역은 유럽인이 좋아하는 모피를 얻기에 좋은 지역이었지만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상인이나 관리를 이주시켜 영토를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19세기 들어 광산 개발, 목재 생산 등으로 활기를 얻었지만 인구 증가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독립국가연합(CIS)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정리해보자.
▲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서기장인 디아스포라 이오시프 스탈린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흩어져... 소련 붕괴후 연해주 귀환했지만 적응에 한계
고려인(高麗人)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립국가연합의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을 말한다. 한인이 거주하는 국가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등으로 다양하다.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이 다양한 국가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1단계는 1864년부터 1936년까지 연해주 이주와 개척으로 설명된다. 조선인이 중국 만주로 이주한 1860년대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들어갔다. 국경 통제가 허술하고 러시아도 인구가 적은 연해주를 개발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해 조선인의 거주를 금지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1864년 조선인 13가구 65명이 이주해 농사를 지은 것이 시초다. 1869년 조선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 농민 6500여 명이 접경 하천인 두만강을 넘었다.
러시아가 조선인의 입국을 막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며 1902년에만 이주민이 3만2000명을 초과했다. 1905년 일제가 조선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이후에는 농민 뿐 아니라 국권을 찾을 방안을 찾으려는 애국지사까지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까지 확대하자 소련은 일본군의 침략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인은 소련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해 첩자로 활동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소련은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인 중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를 체포해 처형했다. 날조된 증거와 약식 재판을 통해 일본 관동군의 스파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2단계는 1937년부터 1991년까지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및 확산의 시기와 소비에트 국민으로 산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1937년 가을 연해주 조선인의 강제 이주정책을 발표했다. 소련 정부의 공식 집계로 17만1781명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 고려인 이주민이 도착한 장소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Үштөбе)로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후 1937년도에만 총 2만530가구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1938~39년 카자흐스탄에 흉년이 들어 일부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으로 재이주해야 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고려인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통행도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소수민족의 언어에서 고려어(한국어)가 제외됐으며 고려인학교는 폐쇄됐다. 국가기관에 취업은 제한되었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3단계는 1992년부터 2000년대 초반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한 혼돈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최고 국가정보기관인 KGB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후 소련은 붕괴됐다.
소련이 해체되며 연방은 15개의 신생 독립국으로 분리됐다. 고려인이 거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부흥했으며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인은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해 차별을 받았다. 특히 현지어를 구상하지 못하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대 초까지 약 7~8만 명의 고려인이 극동 연해주로 재이주했다. 연해주로 돌아간 고려인도 그동안 사정이 달라진 현지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4단계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으로 귀국자가 늘어나는 시기다. 한국 법무부에 따라면 2023년 기준 국내 체류 고려인은 10만4577명으로 10년 전 2만1642명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순이다.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2019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50만 명에 달한다. 우즈베키스탄 약 18만 명, 러시아 약 17만 명, 카자흐스탄 약 11만 명 등이다.
국내 지방자치단체 중 고려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 안산시, 충청북도 제천시, 광주광역시 등이다. 안산시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조선족이 유출된 빈자리를 고려인이 채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광역시의 ‘고려인 마을’은 2002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2022년 우크라이나 난민까지 수용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을 피해 입국했다.
고려인 마을은 일자리 부족, 좁은 거주 공간, 국적 취득의 어려움, 언어 장벽, 고려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제천시는 2023년부터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2024년 11월 기준 제천시에 정착한 고려인이 500명을 넘어섰지만 성공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려면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보인다. 지자체가 정착을 주도하고 있지만 전체 인구에 비해 유입된 숫자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안산시와 광주시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경제적 동기와 문화적 정체성이 뚜렷한 편이다. 이들 지역의 고려인은 자족적 공동체로 발돋움해 러시아어 사용집단 간, 지역 단체와 교류가 활발하다.
제천시의 고려인 수용 정책이 성공하려면 국내외 다른 고려인 단체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비공식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한글 잊지 않으며 생존... 3~5세대로 넘어오며 현지와 동화되어 정체성 사라져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주로 목축업에 종사해 농사를 짓는 노하우는 부족했다.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것도 정치적 목적 외에 농업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실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은 척박한 토지를 개간해 벼농사와 목화 농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1960년대까지 고려인은 인구가 30여 만 명에 불과했지만 농업 분야에서 사회주의 노동영웅 약 200명을 배출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근면 성실,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 정체성 유지 등을 통해 소수 민족이지만 강력한 사회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연해주 이주 초기 조선인은 원주민이나 백인이 버려둔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꿔 농사를 지었다.
고려인이 처음 도착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반사막지대로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해 유럽인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토굴을 파서 생활하며 농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택도 없고 식량도 부족했지만 쉬지 않고 일하며 참혹한 추위를 견뎌냈다.
1953년 거주지 제한 조치가 해제된 이후에는 도시로 이주한 고려인은 자녀 교육에 열정을 투입해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가로 육성했다. 1989년 기준 고려인의 도시 거주 비율은 95%에 달했으며 전문직을 가진 사람이 다수를 점유했다.
이민 1세대는 한국어를 잃지 않기 위해 한국어 신문을 발간하고 문학을 장려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2세부터는 현지어만 구사하는 동포의 비율이 높아졌다. 고려인 3~5세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지만 현지 국가의 문화에 동화됐다.
고려인은 현지 민족보다 같은 고려인과 혼인하며 생김새는 한국인과 흡사하게 유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방문하면 외모상으로 한국인과 구분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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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지역은 유럽인이 좋아하는 모피를 얻기에 좋은 지역이었지만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상인이나 관리를 이주시켜 영토를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19세기 들어 광산 개발, 목재 생산 등으로 활기를 얻었지만 인구 증가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독립국가연합(CIS)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정리해보자.
▲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서기장인 디아스포라 이오시프 스탈린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흩어져... 소련 붕괴후 연해주 귀환했지만 적응에 한계
고려인(高麗人)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립국가연합의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을 말한다. 한인이 거주하는 국가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등으로 다양하다.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이 다양한 국가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1단계는 1864년부터 1936년까지 연해주 이주와 개척으로 설명된다. 조선인이 중국 만주로 이주한 1860년대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들어갔다. 국경 통제가 허술하고 러시아도 인구가 적은 연해주를 개발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해 조선인의 거주를 금지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1864년 조선인 13가구 65명이 이주해 농사를 지은 것이 시초다. 1869년 조선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 농민 6500여 명이 접경 하천인 두만강을 넘었다.
러시아가 조선인의 입국을 막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며 1902년에만 이주민이 3만2000명을 초과했다. 1905년 일제가 조선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이후에는 농민 뿐 아니라 국권을 찾을 방안을 찾으려는 애국지사까지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까지 확대하자 소련은 일본군의 침략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인은 소련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해 첩자로 활동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소련은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인 중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를 체포해 처형했다. 날조된 증거와 약식 재판을 통해 일본 관동군의 스파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2단계는 1937년부터 1991년까지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및 확산의 시기와 소비에트 국민으로 산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1937년 가을 연해주 조선인의 강제 이주정책을 발표했다. 소련 정부의 공식 집계로 17만1781명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 고려인 이주민이 도착한 장소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Үштөбе)로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후 1937년도에만 총 2만530가구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1938~39년 카자흐스탄에 흉년이 들어 일부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으로 재이주해야 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고려인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통행도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소수민족의 언어에서 고려어(한국어)가 제외됐으며 고려인학교는 폐쇄됐다. 국가기관에 취업은 제한되었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3단계는 1992년부터 2000년대 초반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한 혼돈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최고 국가정보기관인 KGB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이후 소련은 붕괴됐다.
소련이 해체되며 연방은 15개의 신생 독립국으로 분리됐다. 고려인이 거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부흥했으며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인은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해 차별을 받았다. 특히 현지어를 구상하지 못하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대 초까지 약 7~8만 명의 고려인이 극동 연해주로 재이주했다. 연해주로 돌아간 고려인도 그동안 사정이 달라진 현지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4단계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으로 귀국자가 늘어나는 시기다. 한국 법무부에 따라면 2023년 기준 국내 체류 고려인은 10만4577명으로 10년 전 2만1642명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순이다.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2019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50만 명에 달한다. 우즈베키스탄 약 18만 명, 러시아 약 17만 명, 카자흐스탄 약 11만 명 등이다.
국내 지방자치단체 중 고려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 안산시, 충청북도 제천시, 광주광역시 등이다. 안산시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조선족이 유출된 빈자리를 고려인이 채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광역시의 ‘고려인 마을’은 2002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2022년 우크라이나 난민까지 수용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을 피해 입국했다.
고려인 마을은 일자리 부족, 좁은 거주 공간, 국적 취득의 어려움, 언어 장벽, 고려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제천시는 2023년부터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2024년 11월 기준 제천시에 정착한 고려인이 500명을 넘어섰지만 성공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려면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보인다. 지자체가 정착을 주도하고 있지만 전체 인구에 비해 유입된 숫자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안산시와 광주시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경제적 동기와 문화적 정체성이 뚜렷한 편이다. 이들 지역의 고려인은 자족적 공동체로 발돋움해 러시아어 사용집단 간, 지역 단체와 교류가 활발하다.
제천시의 고려인 수용 정책이 성공하려면 국내외 다른 고려인 단체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비공식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한글 잊지 않으며 생존... 3~5세대로 넘어오며 현지와 동화되어 정체성 사라져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주로 목축업에 종사해 농사를 짓는 노하우는 부족했다.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것도 정치적 목적 외에 농업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실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은 척박한 토지를 개간해 벼농사와 목화 농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1960년대까지 고려인은 인구가 30여 만 명에 불과했지만 농업 분야에서 사회주의 노동영웅 약 200명을 배출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근면 성실,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 정체성 유지 등을 통해 소수 민족이지만 강력한 사회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연해주 이주 초기 조선인은 원주민이나 백인이 버려둔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꿔 농사를 지었다.
고려인이 처음 도착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반사막지대로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해 유럽인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토굴을 파서 생활하며 농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택도 없고 식량도 부족했지만 쉬지 않고 일하며 참혹한 추위를 견뎌냈다.
1953년 거주지 제한 조치가 해제된 이후에는 도시로 이주한 고려인은 자녀 교육에 열정을 투입해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가로 육성했다. 1989년 기준 고려인의 도시 거주 비율은 95%에 달했으며 전문직을 가진 사람이 다수를 점유했다.
이민 1세대는 한국어를 잃지 않기 위해 한국어 신문을 발간하고 문학을 장려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2세부터는 현지어만 구사하는 동포의 비율이 높아졌다. 고려인 3~5세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지만 현지 국가의 문화에 동화됐다.
고려인은 현지 민족보다 같은 고려인과 혼인하며 생김새는 한국인과 흡사하게 유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방문하면 외모상으로 한국인과 구분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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