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3. 일제 식민지배로 생긴 이산가족 현황... 대륙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만주 개발 추진
태평양전쟁 준비에 동원되며 대규모 희생 치러... 해방 이후에도 경제적 및 정치적 이슈로 귀국하지 못한 한인 많아
민진규 대기자
2026-08-15
2026년 8월15일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논란이 초래됐다. 유명 탤런트가 TV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조상이 살아온 화려한 행적을 자랑하다가 친일파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은 5000년의 유구한 역사 동안 외세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처해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이 큰 편이다. 가장 큰 오점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같은 전란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식민지 지배라고 생각한다.

전쟁으로 초래된 피해가 식민지 지배보다 더 컸을 수도 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출발점으로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심화됐다.

조선 26대 왕인 고종(高宗)은 1897년 망해가는 국가를 되살리 위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후 초대 황제에 등극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허울뿐인 국가였을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일본의 압박으로 망했다.

일본은 1905년 조선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으로 통합을 완성했다. 조선이 멸망하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 희생양으로 전락해 36년 동안 핍박을 받았으며 이산가족도 급증했다.


▲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과 을사늑약 조약문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 일제의 만주 개척단으로 생긴 이산가족... 대륙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만주 개발 추진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했다. 조선말 왕권의 약화와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발호는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1860년대 함경도 농민이 가난과 수탈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게 된 이유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 행렬은 더욱 늘어났다. 농민뿐만 아니라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갖춘 양반, 지식인, 애국지사 등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중국을 지배하던 청(靑)은 서구열강의 침탈에 대항할 여력조차 부족해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막지 않았다. 또한 러시아도 연해주를 영토로 복속시켰지만 인구 부족으로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처지라 오히려 조선인의 월경을 반겼다.

일본은 1932년 만주제국을 건국한 이후 1936년 서울에 선만(鮮滿)척식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제에 농지를 빼앗긴 농민을 만주로 보내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08년 조선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1936년 5월 일본은 ‘만주농업이민 백만호 이주계획’을 발표했다. 100만 가구 즉 약 500만 명의 농민을 만주로 이전하겠다는 구상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만주로 이주시킬 성인이 부족하므로 15~19세 소년의 이민을 추진한다.

1938년 1월 조선인을 대상으로 만주와 몽고를 개척할 청소년 의용군을 모집했다. 만주에서 중국인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분배해 농사를 짓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251개 개척단 8만6530명이 만주로 이주했다.

15~19세에 만주로 이주한 소년들이 20세가 되면 군대에 입대해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어린 소년들은 스스로 거주할 주택을 짓고 농토를 개간해야 했으므로 생활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일본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기준 만주에 82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했다. 하지만 일본인보다 몇 배 많은 조선인이 살았다고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도 많지만 소련과 중국에 의해 보복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자의든 타이든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 중 일부는 중국 공산당에 조력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또한 일부 조선인은 만주제국의 관리나 군대에 복무하며 중국인을 탄압하는 선봉에 섰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며 해방된 이후 한반도로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은 주로 동북 3성에 거주하며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의 시기에도 살아남았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만들어진 이산가족... 태평양전쟁 준비에 동원되며 대규모 희생 치러

일본은 1931~1945년 진행된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 조선, 대만, 남사할린, 점령지(중서부 태평양, 중국 관내, 동남아) 등에서 강제 동원을 진행했다.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이 근거로 인력, 물자, 자금 등이 수탈의 대상이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은 780만 명을 넘는다. 가장 많은 숫자는 노무자로 약 753만 명, 군인은 약 21만 명, 군무원은 약 6만 명에 달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노무자는 한반도가 648만 명으로 가장 많고 일본이 101만 명, 남사할린이 1만6000명 등으로 조사됐다. 한반도는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구축하며 노무자가 많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본토에서도 탄광, 군수공장, 각종 인프라 건설 현장에 조선인 노무자를 투입했다. 일본 남성은 현역으로 군대에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근로자가 크게 부족했다. 

군인은 육군특별지원병, 학도지원병, 육군징병, 해군 등으로 구성됐다. 가장 많은 인원은 육군징병으로 16만6000명이 넘는다. 지원병을 포함한 해군이 2만2000명, 육군특별지원병이 1만6000명, 학도지원병이 3800명으로 나타났다.

군무원은 군대에 소속돼 군수, 인사, 교육 등의 업무를 지원하는 민간인으로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남방 등으로 보내졌다. 특히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도서로 배치한 군무원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이른바 남방이 3만6000명이며 조선이 1만2000명, 일본이 7000명의 순이다. 만주나 중국은 일본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많이 이주했으므로 상대적으로 조선인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1940년대 만주에 주둔 중인 관동군의 숫자만 70만 명을 상회했을 정도다. 비슷한 규모의 일본 민간인이 만주에 정착했다. 군대와 관련된 업무에도 종사했지만 농업이나 광산 개발에도 관여했다.

강제 동원 대상은 군인,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 등이다. 노무자는 국민징용과 할당 모집, 관(官) 알선으로 구성됐으며 공권력을 동원해 모집했다. 노무자에는 ‘여자근로정신대’를 포함한다.

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와 노무위안부로 구분한다. 전자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1945년까지 운영한 ‘위안소’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다. 일본군은 중국 뿐 아니라 태평양, 동남아시아 전선에 일본군위안부를 배치했다.

반면에 후자는 탄광이나 군 공사장에 동원된 위안부를 말한다. 노무위안부는 시업위안부로도 불렸다. 공사장에 일하는 남성 근로자를 대상으로 성을 제공하는 여성을 말한다.

일본군은 군사비밀 누설 방지, 현지 여성 강간 방지, 성병 예방 등의 목적으로 위안소를 만들었다. 위안부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가 없어서 정확한 규모를 추산하기 어렵지만 최대 4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은 취업 사기, 인신매매, 유괴,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등의 수단에 의해 강제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조선의 경우에만 보면 경제난으로 팔려 간 소녀도 적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16년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제출된 일본 정부의 답변서에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이 문서의 내용은 “일본 정부의 관련 부처와 기관이 가진 유관 문서의 연구와 조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서류 검색, 전직 군부 측과 위안소 관리자를 포함한 관계자에 대한 청취 조사, 한국위원회에 의해 수집된 증언 분석 등 전면적인 진상 조사를 실시했다. 이런 조사에서 일본 정부가 확인할 수 있는 서류 어디에도 군과 정부 공무원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forceful taking away)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위원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말한다. 정대협은 일본 정부가 ’강제적인 이송(forcible removal)’을 입증하는 증거가 없다‘는 발표를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관련 문서를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설립해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해 배상하기 위해 정부가 후원하고 있다.

당시 일본 하시모토(橋本龍太郎) 총리는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성명의 내용은 ’나는 일본 수상의 자격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간직했으며 그리고 ‘위안부’로서 치유할 수 없는 물리적, 정신적 부상을 겪었던 모든 여성에게 다시금 진정 어린 사과와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였다.

하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이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출연한 기부금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제적·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놓은 꼼수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결국 위안부 피해 여성 대부분이 보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연구단체인 역사학연구회는 2014년 10월 ’일본군의 관여하에 강제 연행된 ‘위안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감언, 사기, 협박, 인신매매 등에 의한 강제 연행은 한반도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서 진행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폭력성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이후 생존한 강제 동원자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귀국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현지에서 혼인해서 정착했거나 부끄러운 과거를 안고 있어 귀국을 꺼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 남았던 사람들은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남한에 있는 가족과 연락이 끊겠다.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의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비슷한 처지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 이후 동서 양 진영이 극단적인 이념대결을 펼치면서 사회주의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의 귀국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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